옥시-폭스바겐 사태 계기
미국은 소비자 피해에 거액 배상
제품 출시 등 신중해져 예방 효과
한국은 실제 손해만큼만 배상
위자료도 3000만원 이상 드물어
약자인 피해자 소송 지속 못해
서울 변호사 91%가 도입 찬성
‘99.9% 살균,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광고문구를 내걸고 치명적인 독성 제품을 팔아 생명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제조업체 임직원들에 대한 형사처벌로 매듭지어야 할까. 검찰의 수사가 마무리 단계지만, 일부 책임자만 처벌받고 기업은 살아남아 이런 참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민사소송에서 실제 피해의 몇 배가 되는 큰 금전적 손실을 떠안도록 해야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는 기업의 탐욕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변호사 10명 중 9명 “도입 찬성”
15일 서울변호사회는 참여연대와 함께 악의적인 기업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관련 법의 국회 통과를 주요 공동 과제로 삼고 23일부터 집중 논의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한규 서울변회장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폭스바겐 리콜 사태 등과 같이 대기업의 악의적이고 반사회적 행태에 대해 상응하는 책임을 추궁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입법추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제조물 책임법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넣자는 법 개정안이 19대에 이어 20대 국회에서 발의돼 있다.
서울변회가 최근 회원 변호사 1,545명에게서 받은 설문조사에서는 91.7%(1,417명)나 되는 압도적 다수가 도입에 찬성했다. 이들 변호사들 중 55.9%(792명)는 기업의 제조물 책임이나 환경훼손 등에 한해 특별법 형태로 도입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38,5%(546명)는 ‘손해배상 전반에 도입해야 한다’고 봤다.
소비자 위에 군림하는 기업 없애야
“악행을 저지른 기업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책임질 일을 두려워할까요?” 서울변회 인권위원장인 오영중 변호사는 “(배출가스와 연비 등을 조작한) 폭스바겐은 미국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을 우려해 조기에 거액으로 합의했다”며 “대체로 기업들은 한국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발뺌하다가 걸리면 소송만 질질 끌 뿐”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나라 법 체계는 ‘손해의 공평한 분담’ 원칙에 따라 기업범죄에도 피해자들이 입은 실손해만큼만 배상한다. 위자료가 있지만 3,000만원을 넘는 경우는 드물고, 가해자의 과실로 사망해도 최대 1억원을 관행상 한계로 삼는다. 국민의 생명ㆍ안전과 관련된 유해성 검사 등에 소홀해도 부담해야 할 대가가 판매로 얻는 이익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아무런 경고가 없는 셈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지하는 변호사ㆍ교수 모임의 대변인인 전홍규 변호사는 “위자료가 인정되는 경우도 드물 뿐더러, 불법행위가 걸려도 딱 피해분만큼만 합의하거나 소송에서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물으며 빠져나가려는 게 국내 기업들의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제 2의 옥시와 폭스바겐이 소비자 위에서 군림하며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징벌적 손배제다. 오 변호사는 미국 법원이 지난달 초 존슨앤존슨의 파우더가 난소암을 유발했음을 인정하고 피해 여성에게 620억원의 배상을 명령한 판결을 들면서 “기업들이 미국에 제품을 출시할 때는 신중하게 하면서 한국 소비자는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도 징벌적 손배제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형사 처벌로는 기업에 경고 안 돼
위자료 액수를 높이거나 형사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 등이 있지만 한계가 크다는 게 중론이다. 재경법원 J 부장판사는 “대표이사와 실무자 몇몇 징역을 살게 해도, 기업은 법인으로 계속 존재하니 악행이 거듭될 수 있다. 문제의 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배상 책임을 물어야 (재발 방지에)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안전 기준을 지켜야만 경영이 가능하다는 시그널을 줘야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는 시장의 왜곡을 바로잡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행정제재로도 가능하다는 반대 목소리에는 “행정부 권한이 비대하고 규제 그물은 많지만 어디 효과적으로 작동했느냐”고 반문하며 “규제 강화 대신 사후적으로 징벌적 배상을 불리는 것이 자본주의 미국의 방식”이라고 언급했다.
징벌적 손배제가 도입되면 피해자들도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전홍규 변호사는 “소송 비용과 시간 투입 등에 비해 배상액이 적으니 피해자들이 지쳐 포기하거나 기업과 합의하고 끝내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소송 남발의 우려에 대해선 “일정 수 이상 동일한 잘못을 범한 경우에만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요건을 엄격히 하면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아울러 입증 책임을 피해자들에게 부담하게 하는 소송절차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증거 자료를 틀어쥔 기업으로부터 자료를 받을 수 있도록 증거개시(디스커버리)제도를 도입하거나 나아가 입증 책임의 주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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