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은 채소를 먹고 싶다는 욕망은 도시의 직장인들에게 사치다. 힘들게 씻어 잘라놓은 양상추는 이틀만 지나면 이끼 끼듯 가장자리가 분홍으로 변색되고, 냉장고 속 어린잎 채소는 실연당한 사춘기 소년처럼 짓물러 있기 일쑤다. ‘차를 몰고 마트에 간다, 장을 본다, 트렁크에 싣고 돌아온다, 냉장고에 넣어둔다, 먹으려고 보니 시들어 있다’의 무한 반복. 양상추 한 통을 제대로 다 먹어본 기억이 없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돼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도시농부로 전향한다. 씨앗을 심어 잎과 열매를 맺기까지 초기 인프라 구축에 성공하기만 하면, 이것은 그야말로 화수분이다. 따서 먹고 물 주고, 따서 먹고 물 주고의 선순환 고리가 행복한 반복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유통의 과정이 없으니, 화분에서 입으로, 말 그대로 ‘제로 마일리지’. 최고로 신선한 상태의 채소와 과일을 날마다 먹게 되는 축복은 한번 맛 들이면 끊기 어렵다. 부엌에서 농사 짓는 ‘키드닝’(키친 가드닝)이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비단 ‘킨포크 스타일’의 유행 때문이 아니다. ‘세련된 목가적 삶’ 이전에 입이, 간사한 입맛이, 그 푸르고 아삭한 맛을 잊지 못하는 탓이다.
“마트 가기가 제일 귀찮아요”
‘도시농부’ 장진주씨의 부엌과 면한 테라스에서 사람들은 시각과 후각의 동시 습격을 받는다. 식물도감을 무색케 하는 온갖 종류의 채소, 과일들과 그것들이 은근하게 또는 강렬하게 뿜어대는 향기 때문이다. 큰 숨 한 번 들이쉬고 둘러보자. 타임, 로즈마리, 오이, 애플민트, 이탈리안 파슬리, 래디시, 펜넬, 쪽파, 토마토, 이탈리안 치커리, 쑥갓, 배추, 로켓, 바질, 차이브, 딜, 마조람, 줄기콩, 상추가 여기에 있다. 숨이 차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렁주렁 작은 알맹이가 열리기 시작한 포도와 블루베리, 옥수수, 호박, 식용꽃 한련화까지.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섭생의 당위는 이곳 테라스에서 저절로 실현된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초록의 대향연이 펼쳐지면, 수확의 기쁨과 함께 식단의 권력은 자연스레 채소로 이양되는 것이다.
“수확을 제때 해야 하니까 더 자주, 더 많은 양의 채소를 먹게 돼요. 더 많이 먹기 위해서는 이제껏 안 먹어본 새로운 채소 요리법을 찾을 수밖에 없고요. 그러다 보면 맛있으니까 채소를 더 많이 먹게 되는 식이죠.” 대학에서 생물학을, 대학원에서 원예학을 공부한 장씨는 현재 대치동 학원가에서 생물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가 탁월한 도시농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와 무관치 않다. 파워블로거로 베란다 텃밭에 관한 책을 두 권 내기도 한 그는 자연스레 관심이 요리로 뻗어가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로 유학을 떠났다가 올 초 귀국했다. 채소 소믈리에 자격증도 갖고 있다.
“햇빛 잘 드는 곳에 두고 물만 제때 주면 어렵지 않아요. 애플민트 같은 건 진짜 잡초처럼 잘 자라거든요. 날마다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잔’ 하는 거죠.” 성공한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게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실패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병충해는? “약을 쳐야겠다 싶으면 그냥 다 따서 먹는다.” 퇴비는? “액상 양분인 양액을 물에 희석해 매일 뿌려주거나 질소성 비료를 일주일에 한번씩 주면 된다.” 물은 언제 얼마나? “잎이 크고 개수가 많을수록 물이 많이 필요하다. 보통의 채소들은 2, 3일에 한번씩 주면 된다.” 언제 수확하나? “꽃대가 올라오면 꽃 피우는 데 에너지를 집중 투입하기 때문에 채소 맛이 쓰고 맵고 억세진다. 그전에 따서 먹는다.” 겨울에는? “실내에서 잘 자라는 새싹 위주로 키우면 된다. 브로콜리나 방울양배추 같은 건 새싹만 먹어도 충분하다. 굳이 안 사먹어도 된다.”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초보자거나 ‘킬링 핸드’라면 더더욱 믿기 어렵다. 차라리 마트에 가고 말지. “일과 중엔 바쁘고 퇴근 후엔 피곤한데 어떻게 마트에 가요. 집에 와서 그냥 따기만 하면 되는데.” 장씨는 키드닝의 좋은 점을 설명하기 위해 바질을 예로 들었다. 바질은 따는 즉시 시들기 시작하는 관리하기 힘든 잎채소 중 하나다. 그래서 시중에 유통되는 생바질은 값이 비싸다. 열 쪽 될까 싶은 게 몇 천원씩 한다. 유통망도 제한돼 있어 한살림이나 프리미엄 마켓 같은 곳에 가야 구할 수 있다. “바질을 한 바구니 따서 걸죽하게 갈면 아무 때나 바질페스토를 먹을 수 있거든요. 마트에 가서 사려면 큰 맘 먹어야 하잖아요.”
바로 따서 먹는 텃밭샐러드, 바질페스토
집에 먹을 게 없으면, 우리는 라면을 끓인다. 하지만 ‘키드너’(키친 가드너)들은 화분에서 입맛대로 채소를 뽑는다. 주말농장이나 텃밭까지 나갈 필요도 없다. 오늘은 상추와 쑥갓과 줄기콩과 래디시를 뽑고, 내일은 브로콜리와 방울토마토와 로켓과 바질을 뽑는다. 날마다 조합이 달라지는 ‘텃밭 샐러드’다.
장씨가 래디시 몇 알을 쑥 뽑고, 상추와 쑥갓을 딴다. 줄기콩도 색깔별로 두 종을 딴다. 래디시는 얇게 썰어 찬물에 담가 매운맛을 빼고, 통째로 먹는 줄기콩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상추와 쑥갓은 깨끗이 씻어 한입 크기로 자른 후 믹싱볼에 넣고 섞는다. 여기에 아보카도와 식용꽃 한련화, 블루베리 몇 알을 얹은 후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리면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텃밭샐러드가 된다. 아보카도의 부드럽고 기름진 맛과 한련화의 톡 쏘는 맵싸한 맛, 줄기콩의 아삭하고 고소한 감칠맛이 더해지면 채소맛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는다.
키드닝의 욕구를 한껏 자극하는 바질페스토는 수확의 기쁨과 동의어에 가깝다. 부엌을 가득 메우는 바질의 상쾌하고 향긋한 내음이 이미 식욕을 한껏 부풀려 놓은 상태. 블렌더에 바질잎을 가득 넣고 올리브오일과 파르메산 치즈, 잣을 약간 첨가한다. 죽처럼 걸쭉한 상태를 일컫는 페이스트의 이탈리아어가 페스토. 가열 조리하지 않은 소스를 말한다. 빻듯이, 너무 묽지 않게 바질 잎을 갈면 끝이다. 꼬불꼬불한 손가락 마디 크기의 파스타, 푸실리를 삶아 시원하게 식힌 후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한입 크기로 썰어 얹는다. 여기에 바질페스토를 얹어 비벼먹으면 카프레제를 재해석한 냉파스타가 완성된다. 시판 페스토에서는 느낄 수 없는 거칠지만 묵직한 맛이 ‘즐겁게 채소 과식하기’를 유발한다. 간결한 조리법을 특징으로 하는 이탈리아 요리는 바로 그 이유로 텃밭 음식에 자주 등장한다.
애플민트 빻아서 날마다 모히토
헤밍웨이가 사랑한 쿠바의 술 모히토는 이제 거의 국민칵테일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배우 이병헌이 “모히토 가서 몰디브나 한잔 하자”고 한 대사 때문만은 아니다. 라임과 애플민트가 빚어내는 상쾌하고 청량한 술맛은 요 몇 년 새 여름의 맛과 완전히 등치됐고, 카페와 편의점 음료로까지 출시됐다. 물론 맛의 격차는 가격에 정직하게 비례한다.
키드닝 덕분에 애플민트가 지천인 장진주씨의 집에서 라임즙과 주스로 맛을 내고 형식적으로 민트 이파리 몇 장 띄운 모히토는 모히토가 아니다. 한 바구니 따다가 빻아서 컵의 절반은 되도록 애플민트를 넣은 것이어야 모히토라 부를 수 있다. 그 옛날 놀이터에서 나뭇잎 빻으며 소꿉놀이 했던 것처럼, 도마 위에서 칼을 거꾸로 세워 격렬하게 애플민트를 빻는다. 설탕을 적당히 뿌려가며 빻은 애플민트를 컵에 넣고 라임즙을 자작하게 붓는다. 여기에 럼주를 첨가하는데, 알코올 함량 40%인 럼을 맥주 도수(4%)와 비슷하게 맞추려면 10대 1로 희석한다. 계량컵을 사용하면 좋다. 비료로 사용되는 양액이 희석해 사용해야 하는 농축액이라 계량컵은 키드닝의 필수품이다. 물 20㎖에 럼주 200㎖를 섞어 네 잔에 나눠 담는데, 물 대신 탄산수를 사용하면 청량감을 배가할 수 있다. 지글지글 올라오는 탄산수 거품과 함께 초록빛이 번져가며 애플민트가 떠오르면 라임 하나 잔에 꽂아 시원하게 들이킨다.
모히토는 애플민트 양이 많을수록 맛있다. 그런데 구하기가 쉽지 않다. 바구니 가득 따다 넣어 진하게 우려내려면 사실 직접 키우지 않고는 힘들다. 얼음 얼리는 물 속에 몇 잎 띄우기만 해도 향긋한 애플민트 냉차를 마실 수 있으니 활용도도 높은 편이다. “잡초처럼 잘 자라는 애플민트나 물만 주면 죽지는 않는 허브, 그 중에서도 바질 같은 걸 초보자들에게 추천해요. 새싹 알팔파와 무순은 누가 해도 실패하지 않는 채소죠. 열무와 콩나물도 집에서 쉽게 키우기 아주 좋은 채소들이고요.”
집은 우리가 생의 모든 것을 직접 하고 싶은 장소로 점점 더 변하고 있다. 에코힐링 공간으로서의 집이라는 강력한 트렌드의 자장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얼갈이 배추가 한창이면 겉절이를 해먹고, 레스토랑과 바를 헤매지 않고도 바질페스토와 모히토를 뚝딱 만들어 먹는 삶. 미식은 더 이상 화려한 스킬이 아니다. 함께 키운 채소를 함께 수확해 함께 요리해 먹는 삶, 이것이 바로 외식 과잉시대의 미식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