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 초기 외교가 일각에서 ‘ABM’이라는 말이 돌았다. ‘Anything But MB’의 머리글자로 ‘MB가 한 것만 아니면 된다’는 얘기다. 지금은 방향이 크게 선회했지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니 ‘드레스덴 선언’이니 하는 대화와 교류 중심의 대북정책이 우후죽순으로 발표되던 이번 정부 초기의 장면이다. 모든 대화통로를 틀어 막았던 이명박정부의 지나치게 경색된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 속에 변화를 요구하던 비둘기파의 희망사항이었으리라.
ABM의 원조는 미국 부시(43대 조지 W 부시 대통령)정부에서 유행했던 ABC(Anything But Clinton)이다. 아들 부시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모든 정책을 폐기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드라이브를 걸었다. 정책의 일관성이나 국가운영의 효율성이야 어찌 됐든 ‘네 편과 내 편은 확실히 구분하겠다’는 미국 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다.
민주ㆍ공화 양당체제가 확고한 미국 정치는 편가르기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다. 공화당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반면 민주당은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낙태와 총기 소유 문제에서는 사생결단식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다. ABC는 승자독식의 양당제 정치에서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하면 바로 ‘디스’를 당할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편을 밀어주기 위한 다양한 장치도 마련돼 있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 와중에 후임 대통령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대표적이다. 얼마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는데,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생경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미국도 우리처럼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는 법(해치법, Hatch Act)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대통령과 부통령은 예외로 규정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심지어 “나는 클린턴 편이다(I’m with her)”라고 노골적으로 편을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한 마디로 탄핵소추를 당하고 “배신의 정치를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는 대통령 발언이 위법논란의 도마에 오르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선출직 공무원의 자유 내지 재량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라는 게 미국정치를 전공한 학자의 설명인데, 별도의 당대표가 선거를 지휘하는 우리와 대통령이 사실상 당대표인 미국 정치 현실의 차이도 있겠다.
오바마 대통령의 후계자 밀어주기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재임 기간 건강보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오바마케어’를 밀어붙이고 적대국과 역사적 화해에 나서는 등의 치적으로 임기 말인데도 불구하고 50%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연임에 성공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도 임기 말 50% 이상의 지지율을 바탕으로 같은 당의 후계 후보를 적극 지원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지원한 앨 고어 후보가 패배한 것으로 미뤄 현직 대통령의 응원이 당선의 보증수표가 아님은 물론이다.
정치 현실이 달라 무망하긴 하지만 이런 제도를 한국에 대입하면 어떨까. 임기 말로 갈수록 바닥을 치는 역대 대통령의 지지율을 감안하면 일단 효과는 크지 않을 게 분명하다. 후보 입장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차라리 중립의 의무를 지키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전임 정권을 향한 사정수사로 임기 말 레임덕을 극복하려는 정치 현실에서는 도리어 ABC화법이 어울려 보인다.
그런데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 주자가 지지율이 30%정도에 불과한 대통령에게 기대기 위해 ‘러브레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의 선거개입이 불가능하고 그의 지원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 검증도 되지 않은 한국 정치 현실을 이 유력주자가 알고 있기는 한지 궁금하다.
김정곤 국제부장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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