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시가 있고 말하지 않는 시가 있다. 후자의 경우 고양이처럼 모른 척 하는 게 좋은데, 방언 같기도 하고 주정 같기도 한 그 읊조림이 불시에 눈을 마주쳐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순간 시는 다시 도망간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척, 그렇게 시가 되고 싶은 시. 김정환(62) 시인의 새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문학동네)은 그런 시들을 담고 있다.
최근 3년 간 발표한 시 중 추려 엮은 이번 시집의 정서는 슬픔에 가깝다. 표면이 미끌미끌해 문명도 관습도 도덕도 좀처럼 묻지 않는 김정환의 시에 슬픔이 선명하게 묻은 건 무슨 이유일까. 2014년 5월 5일에 쓴 ‘물 지옥 무지개’에는 ‘세월호 참사의 말’이란 부제가 붙었다. ‘1/ 자식 잃은 부모들, 슬픔에 희망이 없다. 슬픔을 모르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로 시작하는 시는 30개의 연으로 이어진다.
‘4/ 나라에 국상(國喪)이 있다. 5백 년 전 국상. 나라가 다할 때까지 울어야 국상이다.’ ‘6/ 죽은 어린이날이 있다 죽은 어버이날이 있다. 죽은 스승의 날이 있다. 오 그 밖에 이러고도 세상이 돌아가다니, 우리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7/ 무엇을 했다는 사람들 무엇을 했다는 희망이 없다.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 무엇을 하고 있다는 희망이 없다. 어른들 희망이란 말에 희망이 없다.’
시인이 이 시를 쓴 어린이날은 희생자 수가 304명으로 확인되기 전, 302명까지 집계됐을 때다. 시인은 후에 “그때까지 그 두 사람,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을까”란 각주를 붙여 희생된 자들을 꼼꼼히 호명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을 이어갈 유일한 자격인 듯, 나라가 다할 때까지 울어야 다시 나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듯. ‘29/ 내 이름은 세월호 참사. 울음이 나라의 한몸일 때까지 울어보자.’ ‘30/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시대의 울분에 동참하느라 눈물을 다 뺀 탓인지 정작 시인 자신의 종말 앞에선 한층 노래가 가벼워진다. 시집 곳곳에선 생과 사의 경계에서 이리저리 발장난을 치며 일찌감치 죽음과 면을 트려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띈다.
‘5/ 뭐지, 저, 밀가루 반죽을 얼굴 형용으로 뒤집어쓴 화상은? 시간은 스스로 노인인 적 없이 저 혼자 숱한 노인을 빚을 뿐인데,/ 뭘 착각한 거지 저 한없는 슬픔의 시간은?/ 내려앉은 몸의 지명 아니고 정치 너머 아니고 그냥 쪼잔한 저 말,/ 얘야, 죽음 직전 죽음의 신비주의를/ 그렇게라도 벗어야 한단다…그거라도 벗은 게 다행이라는 저,/ 안도의 껍질. 내 안에서 격하게 밀려나오는.// 6/ 분명의 거푸집, 끝까지는 영영 채울 수 없는, 우리가 생이라고 생각했던.’ (‘고립의 역정’ 일부)
멀쩡히 먹고 자는 와중에도 틈틈이 죽음에 집적대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현실의 많은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난데 없는 늙음 같은 것들. 영원히 늙지 않는 시인에게도 늙음의 문법은 적용되는 모양이다.
‘이제 세계가 늙고 세계의 언어가 늙는다,/ 여기저기 모서리에 자꾸 난데없이/ 복사뼈를 가격당하는/ 인간의 노년 품고 인간의 노년보다 더./ 자연도 늙는다는 건 정신보다 육체가/ 더 조심성을 잃는다는 뜻이지./ 늙음의 문법은 ‘자꾸’와 ‘난데없이’ 같은/ 부사격으로 늙어간다.’(‘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