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의 최대 화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간의 ‘세탁기 파손’ 진실 공방이었다. 신기술이나 제품을 둘러싼 거창한 논쟁이 아니었다.
쟁점은 LG전자의 조성진 대표이사가 행사장 인근의 한 양판장에 전시된 삼성전자 신제품 세탁기를 고의로 파손했느냐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가전박람회 기간에 세계 가전시장 1, 2위를 다투는 두 회사가 세탁기 파손을 둘러싸고 황당한 논쟁을 벌인 것이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결국 법정으로 이어졌고, 지난 10일 법원은 LG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이 조성진 사장에게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두 회사는 별 다른 반응이 없다. 지난해 3월 이미 화해를 한 뒤 모든 소송을 취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심까지 법정 공방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기: 독일에서 벌어진 ‘역대급 초딩 싸움’
2014년 9월 IFA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찾은 조성진 LG전자 사장은 직원들과 함께 삼성전자가 내놓은 ‘크리스탈 블루’라는 신제품 세탁기를 보기 위해 베를린 최대 가전 양판장 ‘자툰(SATURN)’에 들렀다.
이 세탁기는 문이 90도 정도 밖에 열리지 않았던 기존의 드럼 세탁기와 달리 170도까지 활짝 열리는 제품이었다. 삼성은 이 점을 강조해 제품을 홍보해 왔다.
매장을 찾은 조 사장은 세탁기 도어(문)를 열고 위에서 눌러보며 얼마나 튼튼한지 살펴본다. 그런데 조 사장이 다녀간 후 이 제품의 도어 연결부(힌지)가 고장이 나는 일이 벌어진다.
삼성전자는 세탁기 파손을 뒤늦게 발견하고 CCTV를 확인한 결과 “양복 차림의 동양인 남자 여러 명이 제품을 살펴보다 그 중 한 명이 세탁기를 파손시키고 현장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 남자가 바로 조 사장이었다.
LG전자는 조 사장이 현장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해외 출장 시 현지 매장을 방문해 경쟁사 제품을 살펴보는 것은 일반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실험을 과거에도 진행해 온 만큼 파손의 의도를 가진 행위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자툰 직원이 조 사장 일행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LG전자는 돈을 주고 세탁기를 구입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승: ‘극한 대립 후 극적 화해’..정해진 수순
하지만 국내에 돌아와서도 공방이 지속됐다. 삼성은 보도자료 등을 통해 ‘경쟁사 제품을 고의로 망가뜨렸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LG는 ‘제품 내구성이 좋지 않다’며 맞섰다.
급기야 삼성은 ▦재물손괴 ▦업무방해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수사를 의뢰했다. LG 역시 석달 뒤 ▦증거위조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맞고소를 했다. 검찰은 기소 전에 중재를 시도했지만 양사 간 자존심 싸움 양상으로 흐르면서 결렬돼 재판으로 넘겨졌다.
사실 이런 싸움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한해 전인 2013년 냉장고를 눕혀놓고 물 붓기로 용량을 비교한 광고를 놓고 100억원대 소송전이 벌어지는 등 두 회사는 이미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OLED 기술유출을 놓고 쌍방 고소한 사건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두 회사의 분쟁이 ‘끝장을 본’ 사례는 없다. 극한 대립으로 시작하지만 항상 1년 이내 흐지부지되고 만다. 위에 거론된 냉장고와 디스플레이 분쟁 역시 정부 중재로 상호 소 취하로 이어졌다.
세탁기 파손 사건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지난해 3월 두 회사는 상호간의 모든 법적 분쟁을 끝내기로 전격 합의한다.
■전: ‘공소유지에 항소까지’ 주인공이 된 검찰
하지만 사건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삼성 대신 검찰이 갑자기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삼성 측이 조성진 사장 등 임원들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처벌불원서를 제출했음에도 검찰은 공소를 취소하지 않기로 한다.
검찰은 명예훼손 사건의 경우 고소인 측이 취하하면 처벌하지 않는 ‘반의사 불벌죄’가 적용됨에도 “피고인들의 주된 혐의가 명예훼손이며, 이 재판의 관할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공소를 취소하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이를 두고 법조계 안팎에서는 LG전자가 검찰의 ‘괘씸죄’에 걸렸다는 분석이 흘러나왔다. 조 사장이 해외 출장 등을 이유로 검찰의 소환 일자를 몇 차례 연기한데다 피고인의 주소지가 창원이므로 관할 법원을 창원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한 것이 검찰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은 조 사장이 소환 일자를 미루자 출국 금지 조치를 하고 서울 여의도 LG전자 본사와 경남 창원 공장을 압수 수색했다. 겨우 세탁기 파손 논란치고는 과한 대응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검찰은 “삼성 세탁기를 고의로 망가뜨리고 품질을 깎아 내리는 보도자료를 승인하고도 뉘우침이 없다. 출석도 계속 미룬 점 등을 고려해 실형이 선고돼야 한다”며 조 사장에게 징역 10개월을 구형했다.
■결: “승자는 없었다” 소모적 논쟁의 끝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온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2월 조 사장이 “세탁기를 손괴했다는 사실과 고의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유일한 증거인 CCTV 영상에서 조 사장이 문에 큰 힘을 주기 어려운 자세를 하고 있었고, 범행을 증언하는 매장 직원들의 증언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검찰은 즉각 항소를 했지만 지난 10일 공개된 2심 결과 역시 동일한 결론이었다.
용두사미로 끝날 뻔했던 사건은 검찰의 고집 덕분에 진실이 가려졌다. 하지만 드러난 결론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사건이 일단락됐음에도 두 회사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건의 발단이 됐던 세탁기 힌지의 교체비용은 20만9,000원이다. 이 작은 사건에 양사는 회사의 명예가 걸린 양 유치찬란한 ‘초딩 싸움’을 벌였고, 도중에 바통을 이어받은 검찰은 본사를 압수 수색하는 등 ‘견문발검(見蚊拔劍,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이란 속담이 어울릴 만한 과잉 대응을 일삼았다.
이런 소모적인 논란을 벌일 시간에 삼성과 LG가 소비자를 위한 기술과 가격 경쟁을 했다면, 검찰은 세탁기 하나가 파손된 사건에 들인 시간과 인력을 다른 사건에 쏟았다면 어땠을까?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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