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2탄 ▶준비할 서류만 스무고개
3탄 ▶화물선 여행 실전 가이드를 읽고 넘어오세요.
출력한 바우처를 보며 묵념했다. 마치 결혼을 앞둔 사람처럼 묘한 감정의 곡선이 상·하향 그래프를 그렸다. 이 알량한 티켓을 위해 그렇게 기나긴 밀당의 시름을 앓았던가. 화물선은 진정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불현듯 간담 서늘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서, 선박은 부산 어디에서? 대금 결제로 우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바우처엔 자그마치 765.94㎢ 면적인 ‘부산’만 명시하고 있었다.
이젠 단물도 없는 기다림이었다. 선박 대행사인 크루즈 피플 왈(曰), 우리가 승선할 CMA CGM으로부터 기별이 올 거라고 했다. 언제인가는 불투명했다. ‘처음’과 ‘낯섦’은 언제나 불안을 야기하는 법. 혹 밀항 어선의 뱃삯만 얹어준 셈이 아닌가 의심할 무렵, 휴대전화에 낯선 번호가 떴다. “Is Miseung there?”
상대 억양이 천생 한국인인데 서로 한국인이 아닌 척하는 영어 통화가 이어졌다. CMA CGM 한국 지사가 승선 날짜와 장소를 예고했다. 앞으로 3일 후 부산 신항에 화물선이 정박할 거란다. 모든 대화에는 ‘대략’과 ‘아마도’라는 단서가 붙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화물선에서 내정한 J대행사를 통해 부산 신항으로 인솔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 홀로 출국은 불가했다. 부산역에서 약 30km 떨어진 부산 신항은 일반 택시 기사도 잘 모르는 곳인 데다가 출국 심사 절차의 보모가 필요할 거라 엄포를 놓았다. 보모인 J대행사의 대표에게 전화했다.
“저기, 술은 몇 병까지 반입되나요?”
“글쎄, 100kg 짐 반입이 가능하니까, 몇 박스 가능 하려나? 껄껄껄.”
농담이었을 그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며, 서울의 원룸에서 낄낄대며 웃고 기대했다.
승선을 예고한 날, J대행사 대표와 약속한 시각보다 미리 부산에 당도했다. 배가 예정보다 일찍 정박하거나 화물이 LTE 속도로 다 옮겨졌을 때, 우리 따윈 쉽게 버리고 출항할 거란 편집증에 사로잡힌 연유였다. 오후 5시 승선 예정이라더니 4시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당일 아침에서야 들었다. 변덕엔 이미 이골이 났다. 우린 오후 3시경 그를 만날 채비가 되어 있었다.
부산역에서 우리만 달랑 태운 대형 밴이 건조한 빌딩 앞에 섰다. 뜻밖이었다. 출입국 심사 경력 15년 차도 어리둥절했다. 우리의 보모인 J대행사 대표가 곧 ‘보딩패스’였다. 그의 꽁무니를 따라 들어선 부산 신항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일반 탁자 위에서 출국 허가 스탬프가 찍혔다. 이어 진행된 몸과 짐 검사는 단출함의 끝이었다. 짐은 통째로 보안 검색기에, 몸은 흔들거리는 검색대를 통과하면 됐다. 좋아해야 할 대목인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우리를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다. 우리의 보모는 다시 밴에 타라고 손짓했다.
우린 단숨에 압도당했다. 다른 지구별이었다. 늘 영화 속 추격전 장면에서만 보던 컨테이너 박스 사이를 누비다니, 타워 크레인 아래 광활한 도로를 활주하다니! 내리자마자 일개 점이 된 인간이 본 세상, 그토록 아등바등하던 인생을 일시에 종결시키는 기분이었다. 검수를 마친 화물선에 승선 허가가 떨어졌다. 18층 빌딩 높이에 해당하는 화물선으로 입장하는 길은 조그만 움직임에도 격렬히 반응하는 철제 계단이었다. 전율과 공포를 만끽하고 나니, 여러 선원으로부터 환영 인사가 쏟아졌다. Hello! Bonjour! 선원 특유의 화통한 웃음과 뜨거운 온도가 거기 있었다. No Problem? No Problem!
우리가 탄 화물선은 다음날 오전 10시 출항 계획이었다. 이조차 짙은 안개로 작업이 중단된 덕에 오후 2시로 미뤄졌다. 옥상 갑판에서 슬슬 육지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이별 속도는 실제보다 시각적으로 한층 빨랐다. 이제는 진짜 안녕이다. 여행자라는 무면허 바다의 기수가 태평양 항해를 시작했다.
*사족 : 태평양 어딘가에서 점심 즈음, 담배와 술 등 세관 신고서를 적으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들의 세관 허용 범위는 1병의 술과 200개의 담배였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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