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남성 불임환자 5만여명
5년 사이 1.5배나 늘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1970년대 인구정책과는 격세지감인 ‘출산이 애국’인 시대에 살고 있다. 저출산 문제는 이제 주요 사회ㆍ경제적 이슈가 됐고, 쉬쉬하며 감추던 ‘불임’ 문제는 공공의 의제로 등장했다. 현재 임신을 원하는 부부의 약 15%가 불임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비율은 매년 증가 추세다.
최근 부산 동구 아미동 부산대병원 융합의학연구동에 문을 연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도 이런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대표적 사례다.
남성의 불임ㆍ난임 해결과 새로운 불임치료제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연구원의 초대 이사장을 맡은 박남철(60ㆍ사진) 부산대병원 비뇨기과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전국단위 정자은행이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정자 제공과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위한 법ㆍ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설립 논의가 시작됐다”며 “부산대병원은 1997년 국내 최초로 자체 정자은행을 선보여 주목을 받은 이후 관련 연구와 진료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고 설립 배경을 밝혔다.
박 이사장은 “공공정자은행은 무정자증 등 남성으로 비롯되는 원인 때문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난임 부부를 위해 국가가 낮은 비용으로 적합한 다른 남성(비배우자)의 정자를 제공하는 시설”이라며 “정자를 제공해 줄 남성의 정자를 채취해 섭씨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탱크 속에 동결 보관, 필요한 시기에 정자를 해동해 인공수정 또는 시험관아기시술 등의 난임 치료에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동결보전ㆍ공급ㆍ연구기반 등
권역별 거점병원 지정해
정자에 관한 모든 것 관리 계획
이번 연구원 설립은 양질의 정자를 공급함으로써 향후 한국의 저출산ㆍ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불임부부에게도 희망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박 이사장은 “앞으로 전국 권역별 거점병원을 지정, 정자은행을 두고 국가적 네트워크를 갖춘 정자 동결보존과 공급망 완성, 생식의학 연구기반 확립, 공공교육 및 홍보 기능 등 정자에 관한 모든 것을 관리할 계획”이라며 “현재까지 서울대병원, 고려대병원, 단국대 제일병원, 차의과대 강남차병원, 전남대병원, 전북대병원, 충남대병원과 협약을 맺었다“고 말했다. 그는 “거점병원을 더 늘려 국내 모든 정자은행을 개방형 네트워크로 연결, 남성불임 부부에게 건강한 정자를 찾아내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저출산 현상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불임 환자 수는 21만7,905명으로 5년 전(19만2,981명)에 비해 약 12% 늘었다. 남성 불임 환자도 급속 증가했다. 2011년 3만9,933명이었던 남성 불임 환자는 지난해 1.5배 증가한 5만2,902명으로 증가했다.
박 이사장은 “최근 불임 증가세는 노산(老産)과 관계 깊으며 사회ㆍ경제적 구조 변화가 불임을 부채질하는 셈”이라며 “특히 여성의 난자는 노화에 민감해 나이가 들수록 염색체 이상 및 유산 위험성이 높아지는데, 남성은 나이에 따른 영향에 거의 영향이 없지만 선천성 무정자증이나 질병으로 인한 불임 남성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정자은행은 남성이 원인이 되는 불임 외에도 불치의 병에 걸려 방사선 치료 등을 앞두고 있는 남성의 정자예치에도 긴요하다.
박 이사장은 “현재 국내 주요 대학병원 등 거점 병원과 몇몇 불임병원에서 남성불임 부부를 위해 정자은행을 갖추고 있지만 모두 각 병원 내부에 한정된 배타적 정자은행이며 정자 공여자를 확보하지 못해 사실상 정자은행에 정자가 없는 상태”라며 “이 때문에 난임 부부들은 혈액형과 외모 등 유전적 적합성이 뛰어난 동결 정자를 찾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만약 난임 부부가 자신들이 원하는 건강한 최적의 정자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 음성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정자 밀거래 등의 사회적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영구피임, 항암요법과 방사선 치료 등을 앞둔 가임기 남성의 정자를 동결 보존하는 기능도 책임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생명윤리 논의서 사회적 합의 모으는
구심점 역할도 할 것”
현재 프랑스와 영국, 중국 정부는 중앙정자은행과 지역별 거점 공공 정자은행을 운영하며 난치성 난임 부부에게 가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북유럽 일부에서는 군입대 시 일반 병사들에게 정자검사를 실시, 건강한 정자일 경우 정자은행 예치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자은행의 미래를 밝게만 예단하기 이르다. 정자 공여자에 대한 보상과 신원 비공개에 관한 문제, 생명을 매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부정적 시각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재해 있다.
박 이사장은 “금전적 보상 문제는 교통비나 식대를 주는 등 근로대체비용을 지원한다는 뜻이지 상업적으로 어떤 보상을 하는 것은 아니며, 자발적 정자 공여자의 신원도 철저히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면서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동의서 작성 등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특히 생명윤리 측면에서 제기되는 지적 등은 귀를 잘 기울여 사회적 합의를 모아 나가는 게 정자은행연구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부산=글ㆍ사진 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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