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스 국기에는 흰색과 초록 바탕에 ‘붉은 용’이 오른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웨일스의 상징 ‘붉은 용’이 56년 묵은 한을 토해내고 승천했다.
‘웨일스 축구의 심장’ 가레스 베일(27ㆍ레알 마드리드)이 조국의 역사를 새로 썼다.
베일은 12일(한국시간) 프랑스 보르도 누보 스타드 드 보르도에서 열린 유로 2016 슬로바키아와 B조 1차전에서 전반 10분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뽑아 웨일스의 유로 대회 첫 골 주인공이 됐다. 슬로바키아 온드레이 두다(22ㆍ레기아)가 후반 16분 동점을 만들었지만 후반 36분 할 롭슨 카누(27ㆍ레딩)의 결승골이 터지며 웨일스가 2-1로 이겼다. 유로 대회가 1960년 시작한 후 56년 만에 처음 본선 무대를 밟은 웨일스는 첫 승의 감격을 안았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붉은 유니폼을 입은 웨일스 팬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요동쳤다. 웨일스 매체 웨일스 온라인은 이날 수도 카디프의 카디프시티 스타디움 앞에 모인 팬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했다. 붉은 폭죽이 터지고 수십 개의 맥주 캔이 하늘로 던져졌다. 무릎을 꿇고 국기를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1,000명의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한국이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폴란드를 누르고 48년 만에 본선 첫 승을 달성하던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사실 웨일스 선수들은 초반 몸이 얼어 있었다.
웨일스는 전반 3분 만에 위기를 맞았다. 슬로바키아 신성 마레크 함시크(28ㆍ나폴리)가 하프라인 앞에서 볼을 가로챈 뒤 수비수 3명은 물론, 골키퍼까지 따돌리고 왼발 슛을 날렸다. 순간 웨일스 수비 벤 데이비스(23ㆍ토트넘)가 몸을 날려 볼을 걷어내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실점할 뻔했다.
분위기를 바꾼 건 베일이었다. 위력적인 왼발 무회전 킥으로 수비와 골키퍼의 넋을 빼놓으며 흐름을 웨일스로 가져왔다.
베일은 웨일스 축구의 자랑이다. 올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1ㆍ포르투갈)-카림 벤제마(29ㆍ프랑스)와 함께 당당히 ‘BBC’ 라인의 한 축을 담당하는 슈퍼스타다. 그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2006년 5월, 16세 315일의 나이로 웨일스 최연소 A매치 데뷔 기록을 세웠다. 5개월 뒤 유로 2008 지역 예선에서 프리킥으로 골을 터뜨려 A매치 데뷔 득점에 성공했다. 공교롭게 당시 상대도 슬로바키아였다. 10년 만에 베일의 발이 다시 슬로바키아의 골 망을 흔들었고 웨일스 축구에 한 획을 그었다.
베일의 어린 시절 우상은 라이언 긱스(43)였다. 왼발을 주무기로 하는 것도 긱스와 똑같았다. 베일은 긱스의 실력뿐 아니라 정신도 계승했다. 긱스는 선수 시절 내내 잉글랜드의 유혹에 시달렸다. 왼쪽 측면이 늘 고민이었던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오른쪽에 데이비드 베컴, 왼쪽에 긱스가 짝을 이루면 잉글랜드 축구 역사가 달라질 것이다”며 수 차례 귀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출신 아버지와 웨일스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긱스는 어머니의 나라를 택했다. “한번도 나의 팀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34회 우승을 이끌었지만 그는 월드컵과 유로 무대를 밟지 못하고 2008년 은퇴해 기꺼이 비운의 스타로 남았다.
베일도 마찬가지였다. 베일이 어렸을 때부터 잉글랜드는 여러 번 자국 대표로 와주길 원했지만 베일 역시 붉은 용의 전사로 남았다. 긱스와 달리 베일 곁에는 아론 램지(26ㆍ아스널)와 조 앨런(26ㆍ리버풀) 등 든든한 동료도 많다. 그가 대회 전부터 “웨일스는 나의 원맨 팀이 아니다”고 큰 소리친 배경이다. 베일은 슬로바키아와 경기 뒤 “우리 팬들은 최고였다. 마치 홈에서 경기하는 듯 했다”며 “우리는 다 함께 역사를 만들었고 엄청난 순간을 맞이했다”고 기뻐했다.
웨일스의 진군은 계속된다. 다음 상대는 ‘숙적’ 잉글랜드. 16일 오후 10시 격돌한다. 웨일스와 잉글랜드는 같은 영 연방에 속하지만 알아주는 앙숙으로 유럽 현지도 이 경기를 주목하고 있다. 아시아의 중국과 홍콩의 대결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1차전에서 러시아에 1-0으로 앞서다가 종료직전 동점을 허용해 1무에 그친 잉글랜드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베일은 “잉글랜드와 맞대결은 더비 같은 화끈한 경기가 될 것이다. 꼭 승리하고 싶다”고 각오를 전했다.
한편, 잉글랜드-러시아의 경기는 관중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 AP 통신에 따르면 양 팀 경기 뒤 관중석에 있던 러시아 팬이 잉글랜드 응원단 쪽으로 침입했다. 이들은 물건을 집어 던지고 관중석에 걸려있던 잉글랜드 국기를 빼앗았다. 두 팬은 경기 전부터 사흘 연속으로 무력 충돌을 일으켜 경찰이 최루가스와 물대포로 진압하기도 했다. UEFA는 이 사건에 대해 징계위원회를 열 예정인데 러시아에 무거운 징계가 예상된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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