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기가 겁난다. 지하철 안전문을 고치다가 열아홉살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고, 섬 학교의 여교사를 학부모들이 계획적으로 술을 먹여 성폭행한 사건도 일어났다. 전관 변호사와 현직 검사장의 비리는 파고 파도 끝이 없을 듯한데, 역시나 제 식구 감싸기인지 수사 소식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미담이 그리운 시절이다. 美談, 아름다운 이야기. 이야기가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지?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이야기 속 사람의 행동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동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까? 아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행동이 아픈 사람의 아픔을 덜어 주고 힘든 사람을 도와 힘들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도시나 타지로 떠나 “노인들만 남은 동네”는 벌써 오래 전에 우리 농어촌 마을에서 흔한 모습이 되었다. 그런 마을에서 ‘찬호 아저씨’는 동네 어른들이 부치는 택배도 대신 맡아 보내 주고, 농협에서 찾을 예금이나 융자금도 대신 찾아다가 드린다. 아파 누운 노인을 찾아가 깨끗하게 목욕까지 시켜 준다. 이런 찬호 아저씨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꼼짝 못하고 집에 누워 있다. 그러자 ‘영기 할아버지’ ‘수동이 할머니’ ‘민수 할아버지’가 모두 나서서 찬호 아저씨의 얼굴을 씻기고 밥도 떠먹이고 오줌까지 누인다. 동네 어르신들이 너도나도 찬호 아저씨의 “손발이 되”어 아저씨를 돌본다. 그런데 ‘영기’와 ‘수동이’와 ‘민수’는 서울이나 다른 큰 도시에 사나? 이 마을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아이는 또 어디에서 사는 건지 궁금하다.
김현숙 시인의 ‘손발 빌려주기’에서 찬호 아저씨가 먼저 노인들에게 손발을 빌려주었고, 다음에 노인들이 찬호 아저씨에게 손발을 빌려주었다. 사실 미담이랄 것도 없이 그냥 사람 사는 모습을 그린 거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도 나는 읽을수록 아름답고 눈물겹다. 보통 미담을 써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서는 미담이 시가 된다. 동시의 축복이다. 아, 좀 담담하게 써야 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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