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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너무 아픈 충고 “혼자 산에 가지 마”

입력
2016.06.1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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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산에 가는 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성이었다. 돌아보면 두 발로 편히 걷게 된 유년기부터 고향 마을 산과 골짜기를 누볐다. 가난하던 그 시절, 산에 오르면 우리는 부자가 되었다. 문둥이가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참꽃 줄게 눈썹 다오’ 하며 아이들만 꾀어간다고 어른들이 겁을 주어도 어린 우리는 호기로웠다. 이 산 저 골 옮겨 다니며 속이 쓰리도록 진달래와 아카시아 꽃을 따먹고 여린 찔레 순 껍질을 벗겨 친구 입에 넣어주었다. 5월 초순 비 내린 직후 무릉골 민둥산으로 달려가면 우리 힘으로 들고 오기 버거울 만큼 많은 양의 고사리를 꺾을 수 있다는 것도, 그 고사리만 있으면 설령 밥때를 놓쳐 집으로 가도 엄마한테 혼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대여섯 살 우리는 귀신같이 알았다.

큰골 초입 무덤가에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던 할미꽃의 연약한 아름다움은 지금도 눈물 나게 그리운 기억 속 한 풍경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보라색 난초 꽃을 만날 수 있지만, 보드라운 할미꽃 솜털을 조심조심 만지는 것만으로 정신이 아연하기 일쑤였다. 행여 시들까 꺾지도 못하고 손끝으로 쓰다듬다 무덤에 기대 잠든 게 몇 번이던가. 여름이 깊어질 무렵 골짜기 돌 틈에서 몸집을 불린 가재와 모래무지도 우리 차지였고, 늦가을 겉껍질이 쩍쩍 벌어진 으름과 산밤나무 열매를 거두노라면 부쩍 짧아진 해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특히 유월의 산은 내 눈에 낙원이었다. 이 무렵 봄꽃을 떨군 숲은 경이로운 색깔로 변신해댔다. 탱탱하게 여문 나무와 풀의 녹색은 유월 초에 제일 예뻤다. 매일 깊어지는 초록은 아무리 봐도 물리지 않는 이상스런 빛깔이었다. 독 오른 뱀을 만날 위험도 낮고, 쐐기니 송충이 같은 벌레가 득세하기에도 이른 시기. 이때쯤 산은 어린아이 혼자 쏘다녀도 두려울 게 없는 평화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산딸기와 오디가 지천으로 익는 계절이었다. 어릴 적 혼자 들어선 산에서 정말 맛있는 뽕나무를 열매를 발견한 이후, 손과 입 주위가 시커메지도록 오디를 따먹고는 어떤 감정에 휘둘렸는지 큰 소리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 산등성이에 올라 석양을 감상하는 일은 내 유년기의 비밀스러운 행복 중 하나였다.

서울 올라와 오래도록 북한산과 인왕산 언저리를 떠나지 못했던 건 전적으로 산이 선물하는 안온한 평화 때문이었다. 헝클어진 일상사로 머리가 복잡할 때, 일에 치여 심신이 피폐해졌다고 느낄 때, 그저 아무 일 없어 심심할 때 혼자 산에 갔다. 잘 정돈된 도심의 산길을 걷다 보면 모나고 쪼잔해지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서울의 산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주고받는 가벼운 인사와 웃음, 물병을 건네며 나누는 몇 마디 말로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의 속내가 읽혔다. 고만고만한 걱정과 엇비슷한 체험과 짧게 건네는 사심 없는 격려의 말이 지닌 힘은 의외로 컸다.

벼르던 유월 산행을 앞두고 상황이 어그러졌다. 고향에 계신 엄마가 먼저 전화를 주셨다.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니, 당분간 혼자 산에 가지 마라.” 친구와 후배도 문자를 보냈다. “혹시 산행 계획 잡았으면 이번엔 나랑 같이 가요.” 모두의 안식처로 기능하던 서울 산에서 홀로 등산하던 여성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연이어 나온 직후였다.

당분간 조심하면 될까? 익숙한 길에서 홀로 횡액과 마주했을 피해 당사자의 충격과 공포, 한두 명의 악행이 시민 정서에 끼치는 무시 못 할 파괴력, 40년 넘게 내 삶을 북돋워 주던 일이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있음을 불현듯 인식할 때 찾아드는 감정은 슬픔과 무력감, 그리고 분노다. 이틀을 고민하다 예정대로 산에 가기로 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발동했지만 의심과 두려움까지 떨쳐낼 수는 없었다. 동행할 친구를 구했다. 뭔가 묘책이 필요한데 지금 내게는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난감하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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