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배신
송제숙 지음ㆍ추선영 옮김
이후 발행ㆍ348쪽ㆍ1만8,000원
복지 논란에서 가장 답답한 점은 복지가 원래 ‘보수의 의제’라는 점이다.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 등 입에 늘 오르내리는 북유럽식 복지국가의 출발점에는 ‘좌파적 투쟁과 쟁취’가 있을 것만 같지만, 실은 국가적 영광이나 단합 같은 보수적 배경이 더 짙게 깔려 있다. 심지어는 ‘민족의 순결성 유지’ 같은 우생학이나 극우적 논리의 그림자까지도 어른거린다. 복지 정책의 본격적 도입은 인민을 민족국가의 국민으로 호명하는 데 따른 반대급부적 성격이 짙어서다. 그러므로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권에 연계된, 일종의 권리로 봐야 한다. 최근 화제가 됐던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 사례 역시 초점은 ‘공돈’이 아니라 시민권의 보장 방식과 범위에 대한 논쟁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라는 이들은 ‘복지’라는 말만 나오면 죄다 ‘빨간색’만 칠해댄다. 가끔 선거철에 ‘반짝 복지 코스프레’를 하거나, 정치적 위기가 닥치면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따위의 형용사를 보수 앞에다 가져다 붙이는 게 전부다. 참 모를 일이다. 국가, 민족, 순결, 단합 같은 단어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헐떡대는 그 보수가 말이다. 보수라고 자처는 하는데 정작 보수가 뭔지는 고민해본 적 없는 사람들 같다.
‘복지의 배신’은 우리 복지가 왜 이리 됐는지, 그 뿌리를 찾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으로 되돌아간 책이다.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 IMF 외환위기 사태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다’던 호기로운 외침의 소멸이었다. 저자가 인용한 건조한 유엔 통계만 봐도 그렇다. 2.8% 수준이던 실업률은 7~8%로 뛰었다. 노동인구 1,000만명 가운데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질성장률은 5%대에서 마이너스5.8%로 곤두박질쳤다. 실질임금도 마이너스10%를 기록했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흔한 말로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성장이 일자리를 낳고 일자리가 곧 복지라는 식의 개발국가 논리만 있었기에, 어쩌면 대대적인 경제 충격은 제대로 된 복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논의를 ‘개발국가에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로의 전환’으로 요약한다. 사실 ‘신자유주의 복지국가’란 일종의 ‘동그란 네모’와도 같은 형용모순이다. 이 형용모순은 왜 책 제목이 ‘복지의 배신’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캐나다 토론토대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가 마침 한국을 찾았던 때는 1998년이다. 외환위기 이후 긴박하게 돌아가던 때였다. 해외 유학파 전문가로서 대통령 직속, 서울시 직속으로 설치된 몇몇 대책위원회에 참여해 복지 정책 현장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경험을 영어논문으로 정리하고 이를 책으로 보완ㆍ번역해낸 게 이 책이다.눈길을 끄는 사례는 노숙인 문제다. 외환위기는 ‘노숙인의 재발견’이었다.
노숙인은 그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중산층 붕괴 담론이 퍼져나가면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멀쩡히 회사를 다니며 일할 수 있는 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아 있다는 논리 아래 노숙인이 다시 정의됐다. 원래 노숙인은 있었다는 현장의 목소리는 묵살당하고 “취업할 가능성이 있고, 이성애를 기반으로 가족으로 복귀해 재활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남성”이 노숙인으로 떠올랐다. 복지국가인데 그 이전 개발국가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무언가의 발견은 다른 무언가의 배제로 이어진다. 노숙자의 대립항으로 ‘구제불능 부랑인’이 설정됐다. 또 ‘여성 노숙인’의 존재는 아예 지워졌다. 당시 노숙인 실태 조사에서 ‘성별’ 항목이 아예 없었다는 게 상징적이다. 여성 노숙인은 없다는 전제 아래 시작됐고, 조사가 진행되면서도 모든 우선권은 노동시장에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성 노숙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노숙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리 굳어지다 보니 2001년 외환위기를 조기졸업했다는 선언이 나왔음에도, 외환위기 당시 5,000여명 수준이던 노숙자 수는 2008년까지도 4,400여명 수준을 유지했다.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파고든다. 진보적 활동가, 시민단체 등은 여성 노숙자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그 끝에 마침내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는데 문제는 그 논리다. “여성 노숙인이 머무는 쉼터를 ‘재활 쉼터’라 명명함으로써 여성 노숙인에게도 재활의지와 노동 의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강조”했다. 저자는 “젠더의 영역을 넓혔으나 노동 의욕을 강조하는 생산적 복지 체제에 결국 동의”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읽어낸다. 신자유주의는 늘 국가의 축소를 주장한다. 그런데 일련의 복지 정책 과정을 보면 “국가 개입을 축소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시민사회와의 협력 관계를 통해 국가 개입을 확대”했다. 흔히 생각하는 “뒷짐지고 후퇴하는 국가권력”이 아니라 “타인을 통한 권력 행위”를 벌이는 셈이다. ‘거버넌스’니 ‘협치’하는 단어가 ‘들러리’ 비슷하게 들리는 요즘 세태에서 쓴웃음 나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진보의 딜레마’라 표현했다. 의미 있는 얘기지만 반론도 가능하다. ‘보수조차도 내팽개친 복지’ 입장에선 ‘보수에 포획된 복지’조차 부럽기 때문이다. ‘진보의 딜레마’를 뒤집으면 ‘급진적이어야만 한다는 저자의 딜레마’라 부를 수도 있다. 판단은 독자 몫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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