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확충펀드 10조 대출 이어
기준금리 0.25%p 전격 인하
구조조정 국면 ‘마지막 카드’
정부의 재정정책 압박 모드로
한국은행이 1년 만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에 10조원을 대출하기로 한데 이어 기준금리까지 인하하면서 구조조정 국면에서 쓸 수 있는 카드를 사실상 모두 꺼내든 것이다. 이제 구조조정ㆍ경기부양의 공은 그간 “구조조정 지원에 소극적”이라고 한은을 비판했던 정부의 몫으로 넘어가게 됐다.
한은은 9일 서울 중구 한은 본관에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1.5%에서 1.25%로 0.25%포인트 하향 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1.75%에서 1.5%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한 뒤 1년 만의 결정으로, 기존 1.5%였던 기준금리 최저치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금통위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기업구조조정 본격화 등 하반기 국내 성장세가 예상보다 약화된 점을 고려해 기준금리 인하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만장일치로 동결 결정을 내렸던 금통위원들은 이날 전원일치로 금리인하를 택했다. 그만큼 대내외 경제상황이 어둡고, 금리인하가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실제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보다 0.5%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휩쓸었던 지난해 2분기(0.4%) 이후 최저치다. 올해 1분기 국내 경제는 설비투자(-7.4%), 민간소비(-0.2%), 수출(-1.1%) 모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투자ㆍ소비ㆍ수출 모두 역성장을 한 건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던 2009년 1분기 이후 처음이다. 여기에 조선ㆍ해운업 구조조정으로 대량실업 문제까지 가중될 경우 국내 경제가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5월 고용지표가 예상보다 크게 악화되면서 당초 6ㆍ7월로 확실시 됐던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시기가 늦춰질 것으로 보이는 점 역시 한은이 공격적으로 금리 인하에 나선 주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통화정책 운신 폭이 넓어진 한은이 경기 침체ㆍ구조조정 여파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는 것이다. 김명실 KB투자증권 선임연구원은 “8일 발표된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추진계획 및 국책은행 자본확충방안’과 정책 공조 차원에서 시장의 예상(3분기 중 한 차례)보다 빨리 금리인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 구조조정 계획에 발맞추고자 한은이 연이어 내놓은 이 같은 정책은 오히려 정부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다. 그간 정부의 인하 요구에도 “충분히 완화된 수준”이라며 기준금리를 동결해온 한은이 선제적으로 나서면서 이제는 구조조정 세부대책 마련,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등 정부 대책에 이목이 쏠리게 된 것이다. 실제 이 총재는 이날 “추경 편성 여부는 정부의 판단이지만 통화정책만으론 지금의 저성장, 성장잠재력 약화를 막을 수 없다”며 정부에게 후속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다만 한은은 통화완화정책으로 인한 가계부채 급증, 외국인 투자자본 유출 등 부작용은 제한적일 거라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하반기에는 비은행권 가계대출 관리가 강화돼 가계대출 증가세가 둔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본 유출에 대해선 국내 은행의 외환 건전성 등을 고려할 때 급속한 자본유출이 우려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금리인하 효과를 두고선 의견이 엇갈린다. 김은혜 KR선물 연구원은 “미국 금리인상 우려 완화, 유가 상승, 금융시장 안정 등으로 금리인하 여건 최적의 시기”라고 말했지만,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의 변동금리 대출 이자 상환 부담이 줄어드는 것 외에 금리인하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석헌 전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도 “구조조정 이후 산업재편 등 불확실성이 여전하고, 가계부채가 크기 때문에 소비ㆍ투자 진작 효과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 총재가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올 하반기에 경기하방 위험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힌 만큼 추가 금리인하가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한다. 박영선 NH투자증권 연구원은 “9~10월 중 한은이 추가로 금리를 낮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은이 경기부양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이제 거의 다 썼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날 이 총재가 “이번 인하로 기준금리가 실효 하한선에 가까워졌다”거나 “미국의 금리인상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실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금리 인상은 늦어도 9월이 유력한 상황인데, 연준이 금리 인상에 나선다면 한은이 외국인 자본유출 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가적인 금리 인하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서향미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연준의 금리인상에 따른 자금 유출입 변화, 가계부채 증가 부담 등을 고려하면 한은이 연내 추가로 금리를 낮출 확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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