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5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서 ‘헤이트 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ㆍ혐오 발언) 금지법’ 제정 이후 첫 혐한 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시민들이 자유 발언을 하거나, 시위 주최자를 둘러싸고, 도로에 앉아 진로를 방해하는 ‘시트인’(sit-in) 등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저지하면서 시위는 금방 중단되었다. 원래 시트인은 경찰의 제지를 받지만 “이에 대응할 법률(헤이트 스피치 금지법)”이 있고 “경찰도 증오 연설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행진을 차단할 수 있었다고. “헤이트 스피치는 인종차별”이고 “당신들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는 시민들 앞에서 혐한 시위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다.
혐한 시위자들이 든 피켓은 낯설지 않다. “법무성 인권보호국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지켜라. 악(惡)에 가담하지 말라” “반일국가의 국민을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말라” “여기가 한국이냐” 등. 주어나 표현이 조금씩 다를 뿐, 자신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고, 혐오 대상은 사회 분열의 원인이며, 자신들은 ‘역차별’을 당한다는 것이 만국 공통 혐오 세력의 논리이다.
나는 6월 6일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열린 ‘여성 혐오 공동행동’에 참여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행진 도중 손가락질이나 물세례를 받고,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가 신상이 털리고 악플에 시달렸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 범죄를 멈추라고 하는 참가자들은 ‘남혐’이 되고, 외모 평가나 위협을 당하고, 추모 현장에 핑크 코끼리 옷을 입고 나와 맥락과 무관한 피켓을 든 사람을 저지하는 모습은 ‘핑크 코끼리 폭행’으로 와전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여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이 모든 반응이 곧 여성혐오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권력이 불균등한 현실이나 사건의 맥락을 삭제하면 밋밋한 양비론만 남는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지 마세요, 폭력은 나빠요.” 이 속 편한 구름 위의 발언은, 그들이 아무 폭력도 당할 위험이 없는 특권층임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권력 구도가 역전된 ‘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 재일한국인의 ‘일본인 혐오’가 불가능하듯. 그것이 원본의 혐오가 가진 권력이고, 가혹한 이유이다.
폭력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 일본에서는 재특회(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를 제지하는 ‘카운터’들이 활동해왔다. ‘오토코구미’(男組)는 그 중 전직 야쿠자 출신의 남성이 대표인 조직이다. ‘오토코구미’는 카운터들이 시위를 방해한다며 경찰의 제지를 받자, 아예 선봉에 서서 육체적으로 봉쇄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되고, 폭력적이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오토코구미는 일본 시민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했다. 이번 혐한 시위 저지는 하루아침에, 마른하늘에 시민의식 치듯이 뚝딱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간과 경험의 결과물인 것이다. 핑크 코끼리 사건이 ‘남혐’이고 ‘폭행’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오토코구미 활동가나 네오 나치주의자들에 맞서는 독일시민들은 무엇일까? ‘나치 혐오’ ‘우익 혐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최소) 대망신 예약이라는 점 알아두자.
6월 11일 토요일에는 서울 시청광장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린다. 또 혐오 세력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헤이트 스피치를 일삼고 북 치고 장구 칠 것이다. 칼로 찌르고 싶다거나, 사진을 찍어서 아우팅 시킬 것이라는 협박도 풍년이다. 혐오를 혐오로 인정하지 않는 세계, 표현의 자유라고 감싸는 세상에서 혐오에 맞서는 일은 지난하다. 아이고 호혐호오(呼嫌呼惡) 좀 하게 해주시죠. 그렇지만 이 귀한 싸움들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혐한 시위 저지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성숙한 시민의식” “시민 사회의 뚝심”이었다. 이것을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사례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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