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축(社畜)’. 가축처럼 회사에 사육 당하며 일만 하는 직장인을 뜻한다. 마소처럼 열심히 일하다가 급기야 마소가 되어버린 슬픈 존재들. 카프카적 세계가 절로 떠오르는 비정한 알레고리. 지난해 일본에서 수입된 이 단어는 일년도 채 안 돼 대한민국 언중의 언어생활에 급속히 뿌리를 내렸다. 이곳은 ‘노동시간 OECD 만년 1위국’. 사축의 애환과 고통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사축동화’ ‘사축일기’ 등이 인기를 끌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된 책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히노 에이타로 지음·오우아 발행)는 회사와 근로자의 일방적 위계관계로 생성된 사축 문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코믹 가이드북이다. 10년 묵은 ‘고구마’가 쑥 내려가는 ‘사이다’ 같은 제목으로도 모자라 뒤 표지에는 “수당도 못 받고 야근하면서 일이 보람 있으니 괜찮다는 당신, 사람인가 부처인가?” 같은 포복절도할 구절들이 적혀있다. 때마침 대졸 신입사원 네 명 중 한 명은 입사 1년도 안 돼 회사를 그만둔다는 통계가 나왔다. 조직·직무 적응 실패가 49.1%로 가장 큰 이유였다. 견디면 사축, 못 견디면 실직. ‘아, 보람 따위…’의 저자는 사축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오늘도 견디고 있는 당신, 어떤 유형의 사축인가.
1.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노예형 사축
7일 24시간, 언제 불러도 ‘애니콜’인 직원, ‘서비스 야근’(정당한 대가가 제공되지 않는 시간외근무)을 군말 없이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직원을 흔히 사축의 전형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회사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회사원’이라는 보다 넓은 범위로 사축을 정의한다. 회사를 집처럼, 동료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그러므로 사축에 포함된다.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노동자에서 ‘회사 가축’으로의 변모에는 평생고용 시스템의 붕괴라는 사태가 있다. 나와 회사가 함께 성장하며 과실을 나누던 행복한 동거가 끝났음에도 사축이 되어 회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가치관은 공고하게 남아있는 현실이 사축의 각성과 분노를 부른 원인이다.
히노 에이타로가 분류한 첫 번째 사축의 유형은 ‘노도(勞道)’의 ‘일님’을 컬트적으로 숭배하는 노예형 사축이다. “서비스 야근을 강요하고 유급휴가를 못 쓰게 막는 등 근로기준법을 휴지조각처럼 생각하는 회사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들이다. 장기주택마련 대출을 받았거나 부양 가족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유형으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일정 정도 이에 속한다. 노동의 수요보다 공급이 달렸던 고도성장기와 달리 일자리는 없고 인력은 남아도는 경제침체기의 전세 역전이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야”라는 노예형 사축의 마인드를 만들어낸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저는 금요일 밤 퇴근할 때 마음이 제일 무거워요. 월요일 오전까지 마무리 돼야 하는 일더미를 턱 하니 안겨주는 상사 때문이죠.” 문화콘텐츠 기업에 근무하는 성모(39·남)씨는 “사실상 주7일 근무제를 하고 있”는 노예형 사축이다. 주말에도 수시로 불러내고 업무 지시를 내리는 상사 때문에 1년 365일 노트북이 가방에 안 들어 있는 날이 없을 정도다. 여자친구와 만나 놀다가 해야 할 업무 준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데이트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여자친구가 불같이 화를 냈죠. 네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길래 이러냐고 따지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어요.” 왜 그러고 사느냐는 물음에 성씨는 “이걸 바꿀 수가 있나요?”라고 되물었다. “직장 생활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회사가 이렇게 일하는 걸 조장하고 장려하는데 그만두지 않는 이상 따라야죠, 뭐.”
이런 유형에 대한 전문가들의 처방은 “노(No)라고 말하는 법 익히기”다. 끝없이 떨어지는 업무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상실한 이런 사람들은 상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라이프코치 멜라니 앨런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일과 삶의 균형에 관한 팁을 주면서 “생각 없이 예스라고 말하는 타입이라면 말을 멈추고, 즉답을 피하라.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노’라는 결론이 나면 변명도 정당화도 하지 말고 그저 ‘안 된다’고만 말하라”고 조언했다. 주말이면 스마트폰 자동 알림 기능을 꺼두는 것도 방법이다. 여러 연구결과가 지적하는 바,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쁘지만 쫓기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낄 때, 인간의 분노는 완화된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2. 나는 회사와 함께 성장하겠어: 충견형 사축
충견형 사축은 “회사를 너무도 사랑해서 회사와 함께 성장하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품은 유형”이다. “충성심이 지나친 나머지 회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회사의 실적이 나빠지면 어떻게든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하다가 침몰하는 배와 함께 익사하는 사축들이다. “일개 직원에 불과하지만 ‘경영자 마인드’를 갖고 행동”하며 “종업원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당연하게도 회사에 이익이 될 행동을 선택”한다.
금융계 대기업에 다니는 이모(42·남)씨는 “마치 오늘이 일요일인 줄 몰랐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업무 관련 호출을 하는 상사들 때문에 “사축 인생을 벗어날 수 없다”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 도움이 되고 어쨌든 회사가 잘 돼야 나도 잘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업무 호출에 불만을 표하지 않고 응하는 이유다. 근본적으로는 “월급을 받아야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지만 “명함이 존재의 기반인 한국문화 영향도 크다”고 그는 생각한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는 ‘○○동에 사는 42세 이○○입니다’가 아니라 ‘○○기업에 다니는 이○○입니다’라는 간판이 있어야 하잖아요. 무슨 조직에든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데, 경제적인 측면까지 고려한다면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가 가장 알맞은 조직이니까 부당하더라도 충성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히노 에이타로는 “아무리 충성해도 회사에 품은 충성심은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난다”며 “회사 없이 자기 인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지나치게 회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애사심을 갖는 수준을 넘어 기댈 곳이 사라졌을 때 자아까지 함께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회사와 나의 적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3.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 기생충형 사축
일은 잘하지 못하면서 필사적으로 회사에 들러붙으려는 유형은 기생충형 사축으로 분류된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하고 싶지만, 어지간한 강철 멘탈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삶이다. 게으르게 일은 하지 않으면서 회사의 급여와 복지는 한껏 이용하겠다는 속셈이 지능형 사축처럼 보이지만, 낙하산이거나 철밥통이 아니라면 버티기 쉽지 않다.
직장생활 4년째인 강모(28·여)씨는 기생충형 사축으로 손색이 없는 ‘사수’ 선배 때문에 최근 원형탈모까지 앓았다. 상사들 앞에서 큰소리치며 일을 떠안고 와 후배인 강씨에게 죄다 넘겨놓고, 업무시간 내내 SNS를 하고 개인용무를 보는 건 양반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못 해먹겠다”, “그만둬야지” ‘고충’을 토로했지만, 절대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건 온 회사가 다 알았다. 업무에는 게으르면서 회사 콘도며 각종 복지 혜택을 챙겨가는 데는 또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회사 생활 저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도 정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문제는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거지만.”
다른 사축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 유형의 사축은 그러나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먼저 내쳐질 우려가 있다. 히노 에이타로는 “어차피 회사에 들러붙을 속셈이라면 최악의 상황에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확보하라”며 “우선은 회사가 안정적인 동안 회사 밖에서도 통할 전문성을 갖출 것”을 추천했다.
4. 상사에게 잘 보이는 게 최고: 주머니형 사축
주머니형 사축은 “상사나 선배의 비위를 맞추며 회사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하는 ‘사내정치파’를 말한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그 순서대로 승진하는 것도 아니고, 윗사람들이 늘 차고 다니는 주머니처럼 약삭빠르게 비위를 맞추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게 더 나은 전략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변모(35·남)씨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기본적으로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경향이 있지만 해도 너무한 사람들이 있다”며 “주말에 쇼핑 좋아하는 팀장을 따라가거나 식당에 가서도 늘 굽신거리며 팀장 입맛에 맞춰 주문하는 직원이 있다”고 말했다. 상사가 없거나 꺼려하는 일에는 악역을 자처하며 군기반장처럼 하급직원을 괴롭히기도 한다고.
히노 에이타로는 주머니형 사축에 대해 “이 회사를 떠나서는 잘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판단되면, 사내정치보다는 자신의 인재 가치를 높이는 데 시간을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아첨도 능력이지만, 회사 밖에서도 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5. 다들 저렇게 바쁜데 너 혼자 퇴근하겠다고?: 좀비형 사축
충견형 사축의 병증이 깊어지면 도달하는 최후의 단계가 좀비형 사축이다. 경영자의 마인드를 갖는 정도가 아니라, 일개 직원의 본분을 망각하고 아예 경영자처럼 구는 유형이다. 사축이 아닌 인간이 “같은 조직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일찍 집에 가는 직원이나 휴가 가는 동료를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지며 사축 노릇 제대로 할 것을 강제한다. 완장 찬 소인배처럼 “혼자 집에 가니까 좋냐?” “남들 야근하는데 안 찔려?” 같은 공격적 언사를 남발하는 유형으로 “사축 중 가장 골칫거리”다. “인정머리 없는 회사나 경영자에게 마음껏 이용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좀비형 사축에 해당한다고 인정하는 중견기업 과장 김모(41·여)씨는 “본래는 충견형 사축이었는데, 언젠가부터 혼자만 열심히 하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며 좀비형으로 넘어오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급여가 센 회사가 아니다 보니 일에서 보람을 찾으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해야 회사도 크고 나도 성장하고 할 텐데, 열정 없이 일하는 후배들이나 동료들을 보면 얄밉더라고요.” 이런 유형에 대한 처방전으로는 책에 일러스트를 그린 양경수 작가의 한 컷 그림이 딱이다. “경영자의 마인드로 열심히 일할 테니 경영자의 월급을 주세요. 품위유지비와 운전기사도 꼭이요!” 급여와 보람은 반드시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둘 다 중요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경영자의 것은 경영자에게.’
횡행하는 사축 담론은 불공정한 노동현실의 관행과 부조리들에 대한 심리적 반작용이다. 말은 그렇게들 해도 일의 보람이란 “개 따위나 줘버려”라고 웃으며 내던지기엔 너무도 근원적인 자아의 욕구다. 노동조건의 합리화가 지나치게 결락되어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기생충형 사축처럼 일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순 없다. 헤드헌팅 기업 스프링프로페셔널의 정경희 대표는 “상사가 싫고, 회사가 싫어서 쉬엄쉬엄 놀면서 일해봤자 본인의 경력과 성과는 회사가 책임지지 않는다”며 “회사를 위해서가 아닌 나의 경쟁력과 나의 성과를 위해 일하라”고 조언했다. “회사에서 즐거우려면 개인적인 삶도 즐거워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일과 삶의 균형이죠. 가정에서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아침에 출근해서 에너지 넘치고 열정 있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회사에서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 퇴근 후 180도 변해서 조용하게 지내지 않아요. 바쁘고 즐겁게 움직이며 기쁨을 찾아야 해요.” 노동에 삶을 통째로 저당 잡히지 않은 채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기. 사축인생에서 탈피하기 위한 ‘탈사축 제 1 법칙’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한소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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