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월회 칼럼] ‘어른-시민’ 되기

입력
2016.06.07 14:26
0 0

사람은 무엇으로 크는가. 생리적 차원에서 보자면 답은 당연히 “밥과 반찬을 먹음으로써 큰다.”이다. 그럼, 물음을 바꿔보자. 사람은 무엇으로 어른이 되는가. 물론 어른이 되는 데도 입으로 섭취하는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몸집이 어른처럼 컸다고 하여 다 어른으로 치지 않음에 유의해보자. 무엇을 더 섭취해야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사람은 입으로만 섭취하진 않는다. 눈과 귀와 코로도 보고 듣고 맡으면서 무언가를 섭취한다. 또 몸으로도 섭취할 수 있다. 촉각이 듣는 데에 꽤 기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말해 주듯 말이다. 이 가운데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바를 섭취하는 주된 통로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사물(四勿)’이라 불리는 공자의 언급을 참조해볼 만하다. ‘사물’이라 함은 네 가지를 하지 말라[勿]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가 그 출처다. 언뜻 평범하게 보이는, 살짝 삐딱하게 보자면 ‘꼰대’스럽기도 한 말이다.

공자답지 못한 말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말은 둘로 나뉜다. 앞의 두 가지는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바에 대한 언급이고, 뒤의 두 가지는 몸 밖으로 내보내는 바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이런 물음을 구성해볼 수 있다. 왜 공자는 눈과 귀, 이 둘만 거론했을까. 앞서 말했듯 사람이 몸 안으로 뭔가를 받아들이는 통로는 다섯 군데인데 말이다. 또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입은 왜 받아들이는 쪽이 아닌 내보내는 쪽에서 언급됐을까.

힌트는 ‘예(禮)’이다. 받아들이거나 내보내는 쪽 모두 예와의 연동 아래 선택됐다. 유가 경전인 ‘예기’에는 음식과 남녀는 사람의 가장 큰 욕구라는 구절이 나온다. 음식과 남녀는 각각 식욕과 성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유가가 사람의 본능적 욕구를 직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입과 몸을 통한 섭취를 예하고만 연동시킬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또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 말과 행위를 몸 밖으로 내보낸다. 하여 예와 연관 지을 때면 들어가는 쪽보다는 나오는 쪽에서 주로 포착됐다.

반면에 눈과 귀로 섭취하는 것은 정신하고만 연동시킬 수 있다. 장자는 당시 도적단 보스로 유명했던 도척의 입을 빌어, 눈은 미색을 탐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탐한다고 단언했다. 눈과 귀로도 익히 욕망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하지 못한다고 하여 사람이 죽는다거나 삶의 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입에 비해서는 눈과 귀를 본능적 욕구로부터 떨어뜨릴 여지가 훨씬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공자의 주문은 특별하다. 그저 “예의 바르게 살아야 한다.” 유의 훈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눈과 귀로 섭취해야 하는 것은 예여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기 말의 청자로 제후와 대부 같은 통치자나 관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설정했다. 당시 관리가 된다 함은 백성을 가르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곧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으려면 눈과 귀를 통해 예를 섭취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무릇 어른은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에는 자신도 포함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덕목이 자신을 가르칠 줄 아는 역량이기에 그렇다. 자신을 가르친다 함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안을 밥과 반찬으로만 채워서는 곤란하다. 공자가 눈, 귀를 통해 예로 채워야 한다고 주문한 까닭이다. 당시 예는 예의범절뿐 아니라 사회제도 일반을 가리켰으니, 내 안에 채워야 할 바는 결국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앎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듯 녹록지 않은 과업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몸집만 어른이 아니라 참다운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근대 이래 우리는 이러한 어른을 시민이라고 칭해 왔다. 시민의 또 다른 이름이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자양분, 곧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앎을 교양이라고 불렀다. 이를 서적 보급과 의무교육 시행 등을 통해 우리 안에 채워 넣으면서 우리는 성숙한 ‘어른-시민’으로 구성된 사회를 향해 걸어왔다.

그럼에도 우리 현실은 암울하다. 사회 곳곳에서 몸집만 어른인 이들의 일탈과 횡포가 만연하고 있다. 사회적 ‘갑’들은 이념과 지역, 직종, 세대별로 편 가르기에 여념 없고, 사회적 ‘을’들마저 혐오와 폭력에 시나브로 사로잡히고 있다. 갈수록 ‘어른-시민’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이대로라면 앞으로가 더욱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난제일수록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법, 결국 눈과 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란 물음에 답이 있다. 오늘도 강남역과 구의역에 빼곡히 붙은 포스트잇을 담아본다.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