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1990년 2월 출시한 스쿠프의 프로젝트명은 ‘SLC‘였다. 스포츠 루킹 쿠페(Sports Looking Coupe)의 약자다. 스포츠카라고 하기엔 부족한 게 많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스포츠카처럼 보이는 쿠페 스쿠프는 젊은이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았다.
9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자동차는 검정색이었다. 흑백 영화처럼 무채색 계열의 자동차가 도로를 메우던 시절, 스쿠프는 빨강 파랑을 앞세운 색으로 단연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문이 두 개인 쿠페 스타일이었다. 뒷좌석에 들어가 앉기가 불편했고, 차의 성능도 많이 부족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스포츠카든 아니든 본질보다는 그렇게 보이는 ‘껍질’(혹은 형식)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91년 5월에는 현대차가 처음 개발한 ‘알파 엔진’을 탑재한 신형 모델 ‘스쿠프 알파’가, 같은 해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가솔린 터보 엔진 모델이 출시된다. 당시 스쿠프 터보 시승차를 몰고 서울 난곡에서 시흥 방향 굽은 도로를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쭉 뻗어나가는 터보 엔진의 짜릿한 가속감은 압권이었다.
사실 스쿠프라는 차보다 더 의미 있는 건 알파 엔진이었다. 이 엔진은 현대차 엔진 개발의 출발점이었다. 83년 여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회사가 차를 만든 지 20년이 넘었는데 언제까지 남의 엔진을 쓸거냐”며 엔진 개발을 지시했다. 그 해 9월 현대차 본사가 있던 삼일빌딩에 ‘엔진개발실’이 꾸려지며 지난한 엔진 개발이 시작됐다.
프로젝트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개당 5,000만원 상당의 엔진이 냉각 문제로 20대나 깨져나갔다. 일본 미쓰비시에서는 “원하면 우리가 다 제공할 텐데 왜 독자개발을 하느냐”고 만류했다. 84년에는 해외인력 확보에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120명의 응시자중 단 한 명도 데려오지 못했다. 파격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녀교육, 가족 거주 문제 등이 걸림돌이었다.
영국 리카르도사의 지도를 받아 시작한 엔진 설계는 최종 완성까지 무려 288번의 변경을 거쳐야 했다. 이렇게 개발한 1호 엔진의 이름은 원래 ‘HG1’(Hyundai Gasoline 1)이었다. 이를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식으로 변경한 사람은 당시 프로젝트 매니저로 개발팀을 이끌었고 후에 부회장까지 오른 이현순 박사였다. 좀 더 고급스럽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쉽게 와 닿는 엔진 이름이 필요했다고 한다.
처음 개발한 엔진을 스쿠프에 적용한 것은 위험관리 차원이었다. 원래는 엑셀에 탑재할 계획이었지만 실패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물량이 적은 스쿠프로 방향을 바꿨다.
국산 최초의 스포츠카로 등장해 현대차의 첫 독자개발 엔진을 품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쿠프는 95년 5월 생산을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토다이어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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