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 차례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따냈던 미국의 전설적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숨졌다. 향년 74세.
알리의 유가족은 공식 발표문을 통해 알리가 2일 호흡 곤란으로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 입원한 후 3일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숨졌다고 밝혔다. 알리는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이래 여러 차례 입원한 바 있었고 호흡기 질환도 파킨슨병의 합병증이었다.
1942년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난 알리의 원래 이름은 카시우스 마르셀루스 클레이 주니어다. 훗날 그는 이 이름을 노예로 부여받은 이름이라 하여 1963년 ‘카시우스 X’로, 1964년 다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1960년 로마 하계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한 알리는 그 해 프로로 전향, 19연승을 거둔 후 1963년 소니 리스턴과 맞붙어 처음으로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나 1967년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징병을 거부한 탓으로 챔피언을 박탈당하고, 육체적 전성기인 25세에서 29세 사이에 링에 서지 못했다. 1971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권투선수로 복귀한 알리는 1974년 당대 최강의 권투선수 조 프레이저와 조지 포먼을 차례로 꺾고 다시 챔피언에 등극했으며, 1978년에 타이틀을 잃은 후 바로 그 해 재차 획득하기도 했다. 1981년 은퇴했다. 프로 공식전적은 61전 56승(37KO) 5패.
알리는 마케팅이 중요한 프로 권투선수로서 시합 전후의 화려한 언변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이를 상대와의 심리전에 적극 이용했다. 링 안에서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문구가 보여주듯, 속도를 주무기로 한 헤비급에서는 비정통파 선수였다. 젊은 시절에는 빠른 속도로 상대방의 공격을 피한 후 왼손 잽과 강력한 펀치로 상대를 농락했다. 상대적으로 신체가 노쇠한 선수 경력 후반기에는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로프에 기대 상대방의 주먹으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고 체력을 아끼는 ‘로프-어-도프’전술을 고안해 포먼 등 젊고 강력한 적수와 맞섰다.
알리는 흑인 민권운동가로서도 유명했다. 1961년 맬컴 엑스가 활동했던 흑인분리운동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했던 그는 1963년 리스턴과의 챔피언 경기 직후 공개석상에서 이름을 변경하면서 자신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일원이라 선언했다. 베트남전 징병 거부 선언 역시 많은 흑인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나는 베트콩(베트남 공산당)과 싸우지 않겠다. 어느 베트콩도 나를 ‘니거(흑인 비하어)’라 부른 적이 없다”는 그의 발언은 그를 미국 사회의 공적으로 만들었지만, 훗날 반전운동의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가 됐다. 알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흑인들의 자부심이었고 그의 반백인ㆍ반주류적 행동은 후대에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와 같은 흑인 스포츠스타의 모범이 됐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네번째 부인 요란다 ‘로니’ 윌리엄스와 7녀 2남이 있다. 가장 유명한 딸 라일라 알리는 아버지를 따라 권투선수로 활동했다. 말년의 알리는 파킨슨병으로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점화자,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도 명목상 기수로 참여했다.
알리의 사망 소식에 수많은 권투계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은퇴한 미국의 웰터급 챔피언 플로이드 메이웨더는 “그는 내가 걸어갈 길을 먼저 개척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전 권투선수 매니 파퀴아오 역시 “현대 권투는 그의 재능 덕을 보았고, 인류는 그의 인본주의에서 더 큰 덕을 보았다”고 추모했다.
프로모터 밥 에이럼은 ESPN에 “알리는 가장 위대한 권투선수이자 자신의 마음 속에서 옳다고 믿는 바를 말한 위대한 발언자였다”고 말했다. 알리와 조지 포먼 간의 경기를 성사시켰던 프로모터 돈 킹은 “알리의 정신은 영원히 살 것”이라며 “그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처럼 모두에게 영감을 주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한 인물”이라고 고인을 기렸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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