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원폭투하 71년 만에 방문한 ‘히로시마(廣島) 평화기념공원’은 거대한 관광단지였다. 히로시마 어디를 가든 안내판에 ‘평화’란 수식어가 눈에 띄고 ‘세계 유일의 원폭피해지’란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평화기념자료관(피폭자료관)에는 ‘平和’ ‘Peace’가 새겨진 티셔츠와 캐릭터상품까지 등장해 해외관광객으로 북적댔다. 원폭어린이상 앞에서 일본 각지에서 온 단체학생방문단의 추모합창을 듣다 보면 누구라도 숙연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71년 전 무고한 희생자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전해져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솟아오른다. 무리지어 묵념하고 구호를 외치고 기계적으로 이동하는 학생들이나 이국적인 모습이 신기한 듯 사진을 찍어대는 서양관광객 모두 눈물이 맺히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이 장면들을 지켜보는 기자의 마음은 무겁고 불편했다. 군국주의 일본 군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편협한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치(高知)현에서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온 초등학교 교장에게 감상을 묻다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책임에 대해 마지막 질문을 던져봤다. “미국 대통령이 피해자의 아픔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됐다”며 감격하던 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국가 레벨에서는….” 말끝을 흐리던 그는 기자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자리를 떴다.
평화기념관은 핵무기의 무서움을 꼼꼼히 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왜 원폭을 투하했나’라는 자료를 훑어보니 “종전 후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피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인 원자탄개발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왜 히로시마였나’라는 항목의 답은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근원적인 물음은 찾아볼 수 없고 미국 책임을 성토하는 교육의 장으로 느껴졌다. 히로시마에선 미국이 ‘전범국’이 된 것 같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인 연설을 현장에서 본다는 게 흥분됐지만 이 역시 모순투성이였다. 연단 주변에 검은 가방을 든 요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핵가방’(Nuclear Football)이었다. 미국대통령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는 존재로, 수분 안에 1,000여발의 핵무기를 발사할 코드와 명령어가 담겨있다. 히로시마의 아픔을 달래러 가면서 핵발사 명령장치를 함께 들고 간 현실보다 더한 역설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핵무기 없는 세계’를 호소한 오바마는 방문의 상징성을 뛰어 넘는 핵감축 방안을 내놓지도 못했다.
모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자폭탄을 맞은 지구상 유일한 국가가 일본이다. 인류를 원폭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면서 정작 일본은 원자력발전에 몰두했다. 그리고 일본 국민은 2011년 3ㆍ11 대지진을 통해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또다른 핵에 피폭됐다.
오바마 연설이 있던 날 오전 한국에서 건너온 피폭자대표단은 한국인위령탑에서 조촐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한 일본 기자가 “일본은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데 한국인피폭자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고 물어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합천에서 온 심진태씨가 “일본은 사과요구 못하지, 전쟁 일으킨 나라가…”라며 분노로 답했다.
일본 정부는 오히려 미국에 정정당당하게 원폭투하의 사죄를 요구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도 아시아주변국을 침탈한 가해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미일간 벌인 히로시마 이벤트는 한국인에게 끓어오르는 자책과 울분, 각성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패전에 대한 내부판단이 나온 1945년 초 일본이 군국주의 광기를 그쳤다면 도쿄 대공습과 오키나와 전투, 8월의 원폭투하도, 그리고 소련의 개입에 따른 한반도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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