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때 이민을 가 40년간 미국에서 기자, 공무원, 사업가로 살아온 김명훈씨가 진짜 미국의 상류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며 쓴 ‘상류의 탄생’(비아북)은 이렇게 포문을 연다. “미국의 주류사회는 우수한 검은 머리 외국인을 좀처럼 ‘우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종차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인간 품격과 전통의 깊이를 중시하는 미국의 상류는 ‘승자’와 ‘상류’를 절대로 혼동하지 않는다.”
이 말을 받아들이려면 하나의 벽을 넘어야 한다.‘와스프(WASPㆍ화이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거부감이다. ‘와스프=위선’이란 공식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은 도처에 있다. 흑인, 여성, 히스패닉계 등 ‘정치적 올바름’을 선점한 이들이 ‘정체성 정치’ 이름 아래 끊임없이 와스프를 비판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때론 와스프 스스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는 참 희한하고 나쁜 놈들이야’라는 식의 자학 유머를 선보이기도 한다.
해야 할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와스프가 세계를 지배하느냐다. ‘상류의 탄생’은 여러 일화들을 섞어가며 이 얘기를 한다. 미국 상류는 쓸데 없이 어렵고 고상한 말을 쓰지 않는다. 또 돈 자랑으로 비춰질 수 있는 언행을 극도로 삼간다. 가령 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성공한 이들은 ‘포르쉐’, ‘롤스로이스’하는 식으로 차종을 들먹이지만 상류는 그냥 ‘차(car)’라고만 말한다.
물론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돈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가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돈 좀 있다는 사람치고 예술ㆍ과학을 후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워렌 버핏ㆍ마이클 블룸버그ㆍ빌 게이츠처럼 재단을 통해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미국 상류를 ‘내면의 계급’이라 부른다. 와스프란 결국 혈통이 아니라 문화인 셈이다. 위선이라 비웃기 전에, 아니 위선이라도 좋으니 우린 이런 ‘내면의 계급’이 존재하긴 할까.
책에 언급된 재미난 일화 하나. 2010년 워싱턴포스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받은 270여개 생일 선물에 대한 평가 기사를 냈다. 베스트 5에는 멕시코의 순은 아즈텍 달력,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곤봉 등이 뽑혔다. 워스트 5도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한국의 ‘삼성 갤럭시 탭’이 올라있다. 이유가 재치 있다. “선물 준비하는 걸 깜빡 해 급히 사온 듯함.” 갤럭시 탭이란 기계 자체야 나쁠 리 없다. 그러나 국가간 외교적으로 주고받은 선물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야 ‘세일즈 외교’라 박수치겠지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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