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발행·408쪽·1만5,000원
리처드 도킨스가 현대 영국이 배출한 과학 분야 최고의 무신론자라면, 문학 분야에서 이 자리는 줄리언 반스(70)가 차지한다. 불가지론자로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신 없는 세계와 죽음은 그에게 생을 관통하는 의제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60대의 문턱을 넘은 작가가 구체적 실감으로 들이닥친 죽음과 공포에 대한 사유를 개인사와 예술사를 가로지르며 종횡무진 펼쳐놓은 에세이다. 냉소적인 영국식 유머와 우아하고 지적인 통찰이 한데 어우러진 이 책은 가족과 친구들을 죽음 연구의 샘플들로 빈번히 등장시킨 까닭에 사생활 노출을 기피해온 이 작가의 회고록 구실까지 한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등으로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이 소설가에게 죽음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다. 죽음의 상세한 과정이 있고, 죽음의 적나라한 순간이 있으며, 죽음 이후의 공허한 처리과정이 있다. 그리고 이 전 과정을 냉철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작가의 눈이 있다. 모두 교사였던 부모-프랑스적인 것을 사랑한 과묵했던 아버지와 가모장의 권력을 행사했던 사회주의자 어머니-의 죽음은 그 과정에서 주체의 일부로 그를 자주 호명한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장기간 요양병원에 기거하던 아버지와 반신불수가 돼 자기통제력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는 미워했던 반스는 아버지의 죽음은 무난하게 받아들인 반면 어머니의 죽음에는 존재가 위태로워진다. 환갑 넘은 아들이 라디오방송에 나와 스스로를 무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자라고 일컬은 것을 힐난하듯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 신을 믿을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어머니는 죽음에 있어서도 아버지보다 한 수 위였다. 반스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로 냉철한 철학교수가 된 형과 달리 어머니의 “정말 시신 같았던” 시신을 직접 보고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춘다. 작가로서의 호기심과 오랜 세월 품었던 분노의 감정과 별개로 “작별의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질질 끌며 쇠락해간” 아버지와 달리 죽음의 과정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처리한 어머니에게 작가는 작별의 인사로 “잘하셨어요 엄마”라고 말한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헤아리려는 작가 정신은 가족과 친구, 친지들의 범위를 벗어나 문학, 음학, 미술사로까지 뻗친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몽테뉴의 언명은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책에 의지하게 된다”는 ‘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에게까지 이어진다. 르나르는 “신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편이 그의 평판엔 더 좋을 것 같다”거나 “신은 우리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 같은 말로 반스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죽음론의 선배가 된 작가다.
죽음과 신의 관계로 만들어지는 네 가지 경우의 수 중 ‘죽음이 두려운데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 속하는 줄리언 반스는 스스로를 타나토포브(죽음혐오자)라고 부른다. 한밤 중 잘못 맞춘 자명종처럼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감각은 암흑 속에서 절규하며 베개를 두드리게 만드는 타나토포브의 운명이다. 수련의 출신인 서머싯 몸은 평온히 죽는 환자들과 비참하게 죽는 환자 모두를 관찰한 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들의 정신이 영원히 살 것임을 암시하는 어떤 징후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개가 죽는 것과 똑같이 죽는다”고 썼다. 26세에 썩어가는 친구의 시신 곁을 며칠이나 지키며 이마에 입을 맞췄던 플로베르는 21년 후 또 다른 친구의 죽음 앞에서는 신경쇠약으로 시신조차 볼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성경은 그저 아름다운 거짓말이며 완벽한 허구문학일 뿐이라고 믿고 있는데, 구덩이를 응시하는 인간의 능력은 나이가 든다고 향상되지도 않는다. 어떻게 죽음을 정면 돌파할 수 있을까.
마지막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명료한 의식과 시간이 남았을 때 선고 받는 죽음을 ‘최고의 죽음’으로 여겨왔던 반스는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책 대신 음악과 함께하겠다고 말을 바꾼다. “나도 생선 냄새를 풍기게 될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지” 이것저것 확인할 것도 많다. 사형수가 독방의 벽을 긁어대는 것은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여기 있었다”라고.”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절멸의 순간 모든 인간이 남기고픈 최후의 유언이기도 할 것이다. 원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Nothing to be frightened of)’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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