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조선말’. 해외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한국어학당에 걸어둔 푯말 속 문구가 아니다. 미국 가수 아노니(앤터니 해거티)가 최근 낸 새 앨범 ‘호프리스니스’에 실린 노래의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해 홈페이지(http://anohni.com/hopelessness/)에 제공해 눈길을 끈다. 노랫말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15개 언어로 번역해 서비스하는 데, 여기에 한국어도 포함된 것이다. 외국 가수가 영어로 발표한 자신의 앨범을 한국어로 번역해 공개하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한국어 번역도 자연스럽다. 의미전달이 매끄럽다. 가사 특성상 완벽한 문장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내용 또한 함축적이라 인터넷 번역기만 돌리면 도통 뜻을 알아볼 수 없는 ‘외계어’ 문장이 나오기 마련인데 아노니의 곡 번역은 다르다. ‘I, who curled in cave and moss/ I, who gathered wood for fire and tenderly embraced/How did I become a virus?’란 가사(‘호프리스니스’)를 ‘나는, 동굴 속의 이끼처럼 세상과 조화를 이뤄왔고, 불을 지피기 위해 땔감을 모으며 세상과 공존했는데 어떻게 내가 세상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요?’로 번역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두뇌 활동으로 번역된 가사임을 알 수 있다. 아노니의 음반을 국내에 유통하는 강앤뮤직 관계자는 3일 “새 앨범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이 많아 아노니가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의미를 함께 나누기 위해 번역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나라 언어 분류에 한국어와 함께 조선말이란 표현을 병기한 점도 흥미롭다. 아노니의 노래에선 실제로 북한이 거론되기도 하는 데, 한국어 옆에 조선말을 따로 언급한 건 북한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아노니는 자신의 앨범에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를 실었을까. 수록곡을 살펴보면 ‘국제 뉴스’와 다를 바 없다. 정치적 의견뿐 아니라 환경 문제에 대한 비판까지 다양하게 곡에 실었다. 아노니는 미국 현 대통령까지 공격한다. 아노니는 신곡 ‘오바마’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당신은 사람들을 염탐하고 재판 없이 사형을 집행하며 미덕과 신의를 저버리고 무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한다. ‘당신이 당선됐을 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 나왔다며 세상 사람들은 환호했다’면서 ‘예전에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당신을 외면하고 있다’는 절망도 쏟아낸다. 이 곡을 쓴 이유에 대해 아노니는 음반사를 통해 “오바마가 고문으로 국제법을 위반하고 나라의 명성에도 먹칠을 하는 관타나모수용소 폐쇄를 약속했지만,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드론으로 모든 용의자를 처형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오바마가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를 비롯해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등으로 세계 평화를 외치는 듯 하면서 정작 파키스탄 등 분쟁지역에서 드론으로 살생을 하고, 더 나아가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아노니는 미 육군의 잔학함을 폭로해 현재 수감 중인 첼시 매닝 사태를 언급하며 오바마 대통령에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패권국가인 미국에 대한 아노니의 반감은 적나라하다. 영국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아노니는 골수란 뜻의 ‘매로우’에서 ‘미국은 다른 이들의 뼈에서 골수를 뽑아 우리들에 화학요법을 투여하듯 다른 나라의 경제를 망가뜨린다’고 반미에 대한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익서큐선’에선 ‘사형은 북한처럼 미국의 이상’이라고까지 비꼬았다. “사형은 미국의 큰 돈벌이 사업”이란 게 아노니의 주장이다. 아노니는 ‘익서큐선’이란 곡을 쓴 배경에 대해 “유럽연합이 사형을 집행할 때 쓰는 주사약 수입을 금지하자 수감자를 죽일 수 있는 독극물을 계발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 ‘4도만 올랐을 뿐인데 바다 위로 뒤집힌 채 떠오른 물고기를 지켜봐야 한다’(‘4 Degrees’)며 지구촌 온난화에 대한 아픔을 노래하기도 했다. 자연과 정치를 아울러 고민해야 할 세계의 현안들을 환기시킨 것이다.
아노니는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가는 음악인이다. 성전환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1998년 밴드 앤터니 앤 더 존슨스를 꾸려 2004년 낸 2집 ‘아이 엠 어 버드’로 이듬해 영국 3대 음악상인 머큐리프라이즈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으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번에 ‘호프리스니스’에서 여성적인 활동 명까지 내세워 자신의 음악에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화했다. 음반사 측에 따르면 아노니는 여러 나라에 보낸 보도자료에서도 자신을 ‘그’(He)가 아닌 ‘그녀’(She)로 표현했다. 이런 변화는 새 앨범에서 두드러진다. 아노니는 신곡 ‘바이올런트 멘’에서 ‘내(여성) 몸에서 나온 네(남성)가 이젠 날 죽이려 한다’고 흐느끼듯 노래하며 남성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모든 나라의 여성적 시스템 정착을 위해 만든 곡”이라는 게 아노니의 설명이다.
다소 과격해 보이는 노랫말과 달리 아노니의 목소리는 여리다. 떨리는 가성은 따뜻하면서도 불안하고, 중성적이라 묘한 매력을 주기도 한다. 메시지가 아닌 아노니의 섬세한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영화 ‘아임 낫 데어’ O.S.T에 실린 ‘녹킹 온 헤븐스 도어’를 들을 만하다(앤터니 앤 더 존슨스의 앨범도 좋지만 국내 음원 사이트에서는 유통이 되지 않는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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