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희는 아기란다
변기자 글ㆍ정승각 그림
사계절 발행ㆍ40쪽ㆍ1만3,000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덕분에 거듭 호명되고 있는 히로시마는 나 같은 전후 세대에게도 문학과 영화의 힘으로 끔찍한 재앙의 이미지를 새겨 주었다. ‘춘희는 아기란다’는 그때 그 히로시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식으로 그 재앙이 지속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평화그림책 열한 번째 작품이다.
도쿄에서 살다가 오카야마현(히로시마 피폭자들이 대거 이주한 지역) 바닷가 마을로 이사 온 초등 3학년 유미는 학교 오가는 길의 초라한 산비탈 집에 어쩐지 마음이 끌린다. 마당에 널려있는 하얀 기저귀, 빨래를 건사하며 낯선 노래를 구성지게 읊조리는 할머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익힌 그 노래를 피리로 불며 지나는 유미를 할머니가 들어오라 손짓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예쁜 아기’를 보리라는 유미의 기대는 ‘이 다음’을 약속 받지만, 사흘 뒤 아침에 무참히 스러진다. 산비탈집 쪽에서 달려 나온 구급차를 보고, 방과 후에야 달려간 할머니에게서 예쁜 아기에 대한 참혹한 비밀을 듣고, 유미의 작은 가슴은 거듭 내려앉는다.
올해 ‘강아지똥’ 출간 20주년을 맞는 그림책 작가 정승각의 이 역작은 2005년 오사카 어린이문학관에서 열린 한국그림책 심포지엄에서 만난 한국, 중국, 일본 그림책작가 12명이 평화그림책회의를 도모하면서 기획한 결과물이다. 침통한 격노를 순정한 피리 소리로 풀어낸 원폭 2세 ‘춘희’에 대한 글은 그보다 먼저 2000년 재일동포 작가 고 변기자로부터 직접 건네 받아 간직하고 있었으니, 8년여 세월을 일본 현지 답사와 취재에 이어 온갖 그림 기법과 채색 기법을 실험하여 장면 장면 풀어낸 그림책 작가의 제작기는 꽤나 두꺼운 역사를 품은 셈이다. 각필(나무젓가락을 깎아 만든 붓)과 숯가루를 아교에 개어 거즈 천으로 두드려서 빚어낸 그림들은 성스럽고도 진귀하다.
할머니네 예쁜 아기가 유미 자기 엄마와 같은 마흔셋이라는 것,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끌려간 할아버지를 찾아 히로시마에 갔던 할머니가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 그 봄에 홀로 낳은 아이 춘희를 열심히 일하며 키웠지만 자라지 않는 채 온종일 누워 지낸다는 것, 그래서 기저귀 빨래가 많다는 것, 춘희가 조선 노래라도 듣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날 불러준다는 것….
지금껏 들었던 어떤 것보다도 슬픈 이야기를 듣고 난 유미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반 친구 미도리와 토모에게 할머니네 얘기를 한다. 그러고 셋은 다가오는 일요일에 춘희 아주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할머니가 부르던 노래 ‘고향의 봄’을 피리로 연주해드리자고 약속한다. 피리 연습을 하는 바닷가 마을 아이들의 실루엣이 거룩하다. 전쟁광들의 세계로부터 아득히 먼 원시 바닷가에서, 세 천사가 하늘에 올리는 평화의 제의(祭儀)일까.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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