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일일수록 하청 재하청
영세업체들 안전투자 능력 부족
빠듯한 납기 맞추려다 사고 빈발
하청직 사망률, 원청의 두 배
원청은 납기ㆍ단가 절감만 급급
대형 사고 발생해도 처벌 안 받아
울산 소재 대형 조선소에서 3년 전부터 ‘물량팀’(1차 하청업체로부터 도급을 받는 10~30명 규모의 재하청 계약직 노동자 집단) 소속 전계장(전기 배선ㆍ결선 작업)공으로 일해 온 권기오(42ㆍ가명)씨는 얼마 전 아찔한 일을 겪었다. 비 오는 날 둥근 배관을 밟고 일하다 10여m 아래로 추락할 뻔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돼도 비계가 바로 설치되지 않는 일은 너무 흔해서 익숙할 정도다. 아무래도 조선업에 닥친 구조조정 광풍에 어수선해진 현장 분위기가 집중력을 흩트렸던 모양이다. 권씨는 “7년쯤 본공(1차 하청업체 직원)으로 있다가 시급이 너무 낮아 2013년 물량팀으로 옮겼는데 적은 인원으로 단기에 고강도 업무를 완수해내야 하는 특성상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다단계 하청이 흔한 조선업 종사자들 가운데 권씨 같은 재하청 노동자는 중층 고용 구조의 맨 아래 위치하는 을(乙) 중의 을이다. 발주 일감 중 가장 위험한 일들이 이들에게 돌아간다.
가장 위험한 일 떠맡는 재하청 노동자
1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에 따르면 올 들어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7명이다. 산재로 13명이 숨진 2014년 상황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나올 정도다. 올해 사망자 7명 가운데 5명이 하청 노동자였다. 2014년에는 13명 중 8명이 하청직이었다.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비율이 더 높아진 셈이다.
다행히 올해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가장 위태로운 것이 물량팀이다. 통상 숙련도가 높아진 하청직이 돈을 더 벌기 위해 물량팀행을 선택하는데, 그만큼 일은 까다롭고 위험하다. 애초에 빠듯한 납기를 충족하기 위해 하청업체가 다시 외주를 주는 것이어서 안전보다 속도가 우선이다.
안전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올 2월 삼성전자 등 원청 대기업의 3차 하청업체(휴대폰 부품 납품업체) 파견직으로 일하던 20대 청년 노동자들이 유해 화학물질인 메틸알코올(메탄올)에 중독돼 시력을 잃었다. 메탄올은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관리 대상 유해물질로 지정돼 있지만 국소배기장치 설치나 보호구 지급 같은 조치를 실시한 하청 사업주들은 없었다. 여력도 없고, 규정을 알지도 못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다루는 물질이 실명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해 3월 발생한 남영전구 수은 중독도 아무런 안전장비나 정보 없이 투입된 하청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됐다.
최근 서울 지하철 3호선 구의역 사망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공부문도 위험한 작업을 외주화하는 데 예외가 없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조 전기분과위원회에 따르면 전봇대 노후 전선 교체 작업을 맡고 있는 것은 한국전력공사의 470여개 협력업체 소속 3,000여명의 하청 노동자들인데 2009~2013년 5년 간 13명이 감전 사고로 사망했다. 비용을 줄이겠다며 2001년 도입한 새 작업 방식이 노동자들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이런 사고를 일으켰다고 노동계는 주장하고 있다.
하청직에 위험이 전가된다는 사실은 수치로 증명된다. 지난 3월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학술지에 실린 이재성ㆍ안준기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의 논문 ‘근로환경에서의 위험노출 정도에 관한 연구’를 보면 근로 현장에서 위험에 노출될 확률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1.8배에 달한다. 특히 파견ㆍ용역 등 간접고용 노동자의 위험 노출 확률은 더 높다.
지난해 은수미 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중대 재해로 숨진 전체 노동자 가운데 하청 노동자의 비중이 해마다 늘어 2012년 37.7%에서 2015년 6월 40.2%까지 증가했다. 전체 노동자의 20%가 사내하청직이란 점(정부 공시)을 감안할 때 하청직의 사망 확률은 원청 노동자의 2배 안팎으로 추정된다.
하청 안전감독도 원청이 책임져야
이처럼 산재 사고가 하청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이유는 영세한 하청업체일수록 안전설비에 투자할 능력이 부족하고, 공기 단축 압박을 받아 안전관리ㆍ감독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청 대기업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납품가만을 고려해 하청을 주고, 하청 노동자들의 사고에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히려 산재가 발생한 하청업체는 다음 번 계약을 기피하기 때문에 하청업체들이 산재 사고를 쉬쉬하며 숨긴다. 금속노조는 “2014년 현대중공업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위험을 미룬 대가로 자사 재해율을 낮춰 산재 보험료를 덜 내는 몰염치한 혜택을 봤다”고 주장했다.
최우선 대책으로는 원청 책임 강화가 꼽힌다. 해당 사업장의 안전 담당 관리자를 먼저 형사 처벌하도록 돼 있는 현행 법 체계상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해도 원청 사업주가 처벌되는 일은 거의 없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질적으로 위험 관리 방식과 수준을 결정할 권한은 원청 사업주에게 있으며 위험한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도 최종적으로 원청에게 돌아간다”며 “사업주의 형사 책임을 적극 인정하고 사업주에게 벌금 외에 다양한 형벌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현주 이화여대 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다단계 하청 시스템 속에 놓인 소규모 영세 사업장이 비용을 들여 시설을 갖추는 등 안전보건관리 자원을 확보하려면 그럴 수 있도록 원청 대기업이 적정한 단가를 보장해줘야 한다”며 “국내 제조업을 보호하고 안전보건을 지키는 일은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위험 업무는 도급이 금지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국장은 “다단계로 행해지는 조선업 비파괴 방사선 업무, 화학물질 설비 업무 같은 위험의 무분별한 외주화에 대한 제어장치가 없어 노동자는 죽고 시민은 불안하다”며 “위험한 업무만이라도 도급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권력관계에서 하청 노동자들이 을의 위치다 보니 계약을 지속하려면 최저가 입찰제 등 불합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을 불가피하게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강한 의지로 규제 강화 정책을 마련하고 입법을 추진해 중층적 고용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안전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산재 사고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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