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탔다. 이 소설 때문에 채식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지 않을까 물어보는 이가 있었다.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채식주의자를 소설 속에나 나오는 특이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채식주의를 선언한 후 남편 회사의 부부 동반 회식 자리에 간다. 거기서 사장 부인은 “저는 아직 진짜 채식주의자와 함께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10년 전 소설이지만 이 말은 지금도 맞는다. 나도 그런 말을 들어보았으니까.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런 낯섦은 자연스럽게 불편함으로 이어진다.
사장 부인은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징그럽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과 밥을 먹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정신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 건, 어찌됐든 음식을 혐오한다는 거 아녜요?”라고 비아냥거린다. 아내의 특이한 취향 때문에 자신의 출세가 막힐 것 같다고 생각한 채식주의자의 남편은 부인의 가족들에게 이를 알리고, 급기야 가족 회식자리에서 채식주의자의 아버지는 부인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인다.
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를 불편해 할까? 고기를 먹는다고 밥상머리에서 ‘징그럽게 생각하는 것’도 ‘짐승 보듯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왜 굳이 고기를 먹이려고까지 할까? 우리의 폭력성을 보여 주려는 작가의 소설적인 장치이긴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특별히 폭력적이라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본다.
술을 생각해 보자. 고기나 똑같이 음식에 대한 취향이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술 마시는 나를 징그럽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지도 않는다. 물론 꽤 오래 전에는 술에 대해서도 ‘채식주의자’와 같은 폭력성이 있었다. “술도 못 마시는 게 남자야?”, “맥주가 무슨 술이야? 맥주 정도는 마셔도 되지.”라는 말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왜? 술을 못 마시거나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몇 번 안 되는 해외 방문 때 식사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때마다 먹지 않는 음식이 있는지를 물었다. 야유회 참석 신청을 할 때도 채식주의자는 미리 체크하게 했고 기숙사 식당에는 채식 식단이 따로 있었다. 그들이 우리보다 배려심이 더 많고 덜 폭력적이어서 그럴까? 그냥 주변에 채식주의자가 많은 것뿐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다 보니 종교도 다양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거나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우리의 단일 민족과 단일한 문화는 그리 좋은 점이 아니다. 급격하게 세계화가 진행되는 세상에서 우리도 다른 문화로 진출해야 하고 다른 문화의 사람도 우리와 함께 살게 되는데,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심지어 그런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 뒤쳐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문화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인권을 유린하고 차별적인 문화는 도태되어야 한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식사 자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말하겠지만 왜 외국 사람들은 불편해 하지 않는가? 결국 ‘불편함’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일 뿐이다.
다만 채식주의자 중에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동기에 따라 또는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따라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그 다양한 채식주의자 중 남을 불편하게 하고 그래야만 하는 채식주의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그런 불편함을 이야기해 보겠다.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 철학,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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