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전날 결혼을 엎은 것도 모자라 술 마시고 팔까지 부러져선 동네 아줌마들에게 “술 먹고 자빠졌어요”라며 해맑게 웃는 딸. 서른 둘이나 되고도 부모 속을 박박 긁는 딸을 향해 요리 중이던 우족을 내던지고 남편에게 말한다. “우리 해영이 내다 버립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미친년이에요.”
배우 김미경(53)은 이 연기를 하고 ‘그래, 진짜 엄마는 이렇지’하는 생각에 숨통이 다 트였단다. 그는 “해영이 엄마처럼 현실적인 캐릭터는 처음”이라며 “실제로는 엄마들이 속 뒤집는 딸내미한테 욕도 하고 등 짝도 때리는데 연기할 때는 한 없이 희생적인 엄마가 되려니 답답했다”며 웃었다.
그의 말처럼 매일 딸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작 딸이 남한테 상처입고 오는 꼴은 못 보는 ‘해영이 엄마’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은 울고 웃었다. 김미경은 오히려 딸 오해영을 연기하는 배우 서현진(31)을 칭찬했다. “모든 표현이 가능한 연기자”라면서.
1985년 연극무대로 데뷔했으니 어느새 연기 경력 31년 차다. 출산 후 아이 말곤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14년 청춘을 바친 연극 판을 빠져 나왔다. 무대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러다 ‘아는 언니’ 송지나 드라마 작가의 “그냥 아줌마로 끝날래?”란 일침에 카메라 앞에 섰다. 17년 드라마 인생의 시작이었다. 상궁, 대장장이, 해커 등 송 작가가 김미경을 염두에 두고 만든 매력적인 캐릭터를 신나게 연기했다. ‘배우가 배역을 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작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27일 tvN 드라마 ‘또 오해영’ 촬영장인 경기 고양시 CJ E&M 일산스튜디오에서 그런 김미경을 마주했다.
-‘또 오해영’ 인기가 굉장하다. 엄마 황덕이에 대한 관심도 높다.
“내가 봐도 재미있다. 해영이 엄마는 현실적이라 좋다. 평소 엄마들이 딸한테 하는 표현들을 다 할 수 있어 신난다. 그 동안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들은 한 없이 희생적으로 그려져 심하게 미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엄마지만 실제로는 엄마들이 속 썩이는 딸한테 화도 내고 때리기도 하지 않나. 시청자들은 저 앞에 가 있는데 연기자들은 옛날 연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
-딸 서현진과 호흡은 어떤가?
“정말 놀랐다. 예전에도 연기를 잘하는 친구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번 드라마에서 ‘최고다 쟤’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특정 연기만 잘하거나 본인과 비슷한 캐릭터일 때만 편하게 연기하는 배우들이 많다. 그런데 서현진은 모든 게 가능하다. 더 이상의 정답이 있을 수 없을 만큼 감정 표현을 진심으로 적절하게 하더라.”
-남편으로 나오는 배우 이한위와 두 번째 부부 역할이다.
“MBC 드라마 ‘7급 공무원’(2013)에서 부부로 나왔다. 그 때도 여주인공의 엄마 아빠였다. 시골마을 농부들로 충청도 사투리를 쓰면서 코믹 연기를 했다. ‘또 오해영’ 송현욱 PD가 그 작품을 재미있게 봤다며 이번에도 해보자고 하더라. 이한위씨랑은 그 때도 호흡이 좋아서 걱정을 안 했다. 역시 척척 맞는다.”
-‘용팔이’(2015) ‘괜찮아 사랑이야’(2014) ‘상속자들’(2013) 등 유독 젊은 시청자가 많이 보는 작품을 주로 했다.
“지루한 건 딱 질색이다. 독특한 캐릭터가 어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특이한 목소리 때문인가(웃음)? 틀에 박힌 캐릭터를 맡으면 내가 금방 지친다. 일일 드라마도 가끔 했는데 아무래도 미니시리즈의 개성 있는 역할이 야외 촬영도 많고 숨통이 트인다. 똑같은 주인공 엄마여도 뭔가 다른 엄마를 보여주고 싶다.”
-‘상속자들’의 청각장애인 엄마나 ‘힐러’(2015)의 해커 역이 인상적이었다.
“수화를 해야 하는 역할이라 도전했다. 대본이 나올 때마다 청각장애인 선생님을 찾아가 동영상을 녹화해 밤새도록 따라했다. 드라마 끝나고 실제 청각장애인 분들이 고맙다고 전화를 많이 주셨다. 방송에 틀린 수화기 많이 나와서 상처를 받았는데, 제가 뜻을 제대로 전달했다고 하시더라. ‘힐러’의 해커도 독특한 캐릭터였다. 컴퓨터 12대를 앞에 놓고 폭탄 머리를 하고 연기를 하는데 평범하지 않아 재미있었다. 지금도 몸을 많이 움직이고 편안하지 않은 촬영이 좋다.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것 같다(웃음).”
-연극배우로 출발했다.
“1985년 극단 연우무대로 데뷔했다. 스물 세 살 때였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무용만 했지만 때려 죽인데도 무용은 더 하기 싫었다(웃음). 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이란 걸 처음 봤다. 번역극이었는데 ‘이 돼지 같은 자식! 지옥에나 가버리라지!’라는 대사가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더라. ‘개새끼, 소새끼, 쌍놈이 욕이지 뭐 저런 욕을 하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관객들은 모두 진지하게 보고 있는데 나만 그렇게 느끼니까 스스로 연극을 볼 수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무대에 섰나?
“연극하던 선배를 따라 우연히 (극단)연우무대를 따라 갔다. 당시 ‘한씨연대기’란 작품의 리허설 중이었다. 양희경, 문성근, 박용수 선배가 무대에서 대사를 하는데 굳은 채로 지켜봤다. 내가 알던 연극이 아니었다. 마치 나한테 말을 거는 듯했다. 해금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완벽한 우리 정서의 연극에 푹 빠진 거다. ‘이런 연극도 있구나’란 생각에 뭔가에 이끌리듯 연극을 하겠다고 했다. 14년 간 사회성이 짙은 연극을 주로 했다.”
-결국 드라마 배우로 더 오랜 기간 활동했다.
“출산 후 모든 걸 접고 아이만 키웠다. 당시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애를 떼어놓고 연기를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하고 싶을까 봐 연극을 아예 안 봤다. 점점 피하게 되더라. 어느 날 친언니 같은 송지나 작가가 ‘너 연기 안 해?’라고 물어 ‘나중에 애 중학교 정도 가면 한다’고 했다. ‘그 때 누가 널 알아줘?’ ‘안 알아줘도 돼’ ‘잃어버린 감각은? 너 그냥 아줌마로 끝날래? 연기해’ ‘누가 날 받아줘? 그럼 언니가 나 살려줘’ 이런 대화가 오갔다. 송 작가가 쓴 드라마 ‘카이스트’(1999)로 드라마를 시작했다. 이후 ‘대망’ ‘로즈마리’ ‘태왕사신기’ ‘신의’ ‘힐러’ 등 송작가의 작품에 연달아 출연했다. ”
-드라마 촬영에 적응이 힘들었을 듯 한데.
“첫 드라마 촬영 때 감독이 ‘하이 큐!’라는 말에 ‘저요?’라고 해버렸다(웃음). 마음대로 뛰어 노는 연극 무대와 달리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묶여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다시 돌아갈 연극 무대에서 방송 연기자 역할을 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만큼 드라마는 내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 분량 촬영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문화도 적응이 안 됐다. 연극배우들끼리는 열댓 명이 라면 하나 끓여놓고 침 뱉어가며 못 먹게 하는 정이 있었다. 드라마는 살벌한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곧 적응이 되더라.”
-나이가 들수록 배역의 폭도 좁아지지 않나?
“섭외는 주인공 엄마로 제일 많이 들어온다(웃음). 나이가 있으니 역할에도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지만 속상하긴 하다. 그래도 개성 있는 역할을 많이 해 본 편이라 다행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한다. 팔로워 수가 3만 명이 넘는데.
“tvN ‘슈퍼대디 열’에 함께 출연한 후배 배우 이유리가 만들어줬다. 지금도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모를 정도로 사실은 컴맹이다. 사진도 올리고 후배들과 소통하니 재미있더라.”
-이후 작품 계획은?
“올 10월 시작하는 드라마 ‘사임당, 더 히스토리’에 갤러리 관장으로 출연한다. 아주 작은 배역인데 안 해본 캐릭터라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연기자가 연기면 뭐든지 해야지 꼴 같지 않게 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랬더니 출연작만 60여 편인 다작 배우가 됐다. 같은 캐릭터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가 지루하지 않도록 늘 극과 극을 오가는 캐릭터를 선택한다. 해영이 엄마에서 갤러리 관장이 된 것처럼 말이다(웃음).”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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