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렇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책임감이 투철한 장남인 데다가 타고난 모범생으로 공부까지 잘하던 나는 이 노래 때문에 괴로웠다. 아무리 모범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하려 해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만은 정말 힘들었다. 밤에는 ‘안 자고 뭐 하느냐’는 아버지의 핀잔을 들어야 했고 아침마다 나를 깨우려는 엄마의 성화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늦잠을 안 잔다. 아니, 못 잔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그리고는 스스로 만족스러워한다. 내가 얼마나 책임감 있는 가장이며 직장인인지 스스로 뿌듯해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는 내 두 딸이 언젠가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 나라의 청년이 되기를 고대한다.
나는 단순히 기다리지만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기다리는데 만족하지 않고 계도하고 강제하려고 했다. 2008년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자신이 ‘얼리버드’임을 강조했다. ‘성문기초영문법’인지 ‘성문종합영어’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이라는 문장을 기억하는 시민들에게 ‘얼리버드’라는 별명은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아무래도 부지런함은 중요한 미덕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대통령의 나이는 만 67세였다.
같은 해에 교육감 선거에서도 이 부지런함이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육감 자신이 부지런한 것에 머물지 않고 학생들에게 부지런함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공정택 후보는 2004년 폐지된 ‘0교시 수업’을 (말이 좋아서 자율화이지)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그는 당선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74세.
이명박 대통령과 공정택 교육감뿐만 아니라 우리 어머니와 장인 어른도 무지하게 부지런하시다. 노고지리 우지지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노인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페터 슈포르크는 올해 번역되어 출간된 ‘안녕히 주무셨어요?’(황소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아침에 그렇게 활기차고 저녁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것은 당신의 공적이 아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훈련이나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일찍 태어난 것에 대한 생물학적 은혜’이다.”
잠은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다. 엄격한 훈련으로 몸과 정신을 강인하게 담금질한 병사들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일은 여간 곤욕이 아니다. 잠은 신경계를 가진 동물의 특성이다. 잠은 그냥 멍하니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다. 잠은 온몸이 새로운 세포를 만들고 뇌가 호르몬을 생성하여 다시 하루를 살 수 있도록 정비하는 귀한 시간이다. 오죽 귀하면 우리가 밥 먹는 데보다 자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쓰겠는가.
잠은 우리가 맘대로 조절하는 게 아니라면 그것을 조절하는 생체시계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 몸에서 중요한 일은 보통 ‘뇌’가 알아서 한다. 대뇌와 소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뇌줄기 또는 뇌간(腦幹)이라고 한다. 대뇌가 의식적인 활동을 담당하고 소뇌가 감각과 운동을 제어하는 부분이라면 뇌줄기는 반사작용이나 내장 기능처럼 무의식적인 여러 활동을 책임진다. 의식, 감각, 운동처럼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는 대뇌와 소뇌와 달리 뇌줄기는 ‘무의식적인’ 영역을 책임지다 보니 그 중요성이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뇌줄기는 우리가 ‘보다 더 잘살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뇌줄기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것이다. 멜라토닌은 낮에 햇빛을 받아야 만들어지고 밤에 분비된다. 아직 불을 사용하지 않던 수십만 년 전의 원시인들에게 멜라토닌은 해가 지자마자 분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멜라토닌 분비시간이 점차 늦어졌다. 특히 사춘기가 되면 대개 밤 11시쯤부터 분비되기 시작해서 아침 9시 넘어까지 남아 있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분비시간이 더 늦어진다. 청소년들이 게으르거나 게임과 핸드폰에 빠져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리적인 사이클이 있는 것이다. (혹시 매일 5~6시에 일어나서 할아버지와 함께 약수터에 다녀오는 중고생 자녀가 있다면 소아정신과에 한 번 데려갈 필요가 있다.)
내가 경기도에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 등교시간 때문이다. 경기도는 이재정 교육감이 취임한 후 중고등학교 등교 시간을 아침 9시로 한 시간 늦췄다. 우리 집의 아침은 평화 그 자체다. 아이는 실컷 자고 일어나서 꽃단장하고 밥 먹고 엄마와 이야기하다가 친구와 만나서 노닥거리며 학교에 간다. 성빈센트병원 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경기도 학생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17% 높아지고 수업시간 집중도도 18% 올랐다고 한다. 아침밥을 먹는 횟수도 당연히 늘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아졌다. 미국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아이들에게 잠도 오지 않는데 억지로 일찍 자라고 성화하고 아침마다 야단치며 깨우는 것보다 충분히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옳다. 가장 핵심적인 정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등교시간을 늦추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은 노인들에게 맞는 말이다. 노인이야말로 일찍 일어나는 새의 모범이다. 한번 바꿔 생각해 보자. 괜히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벌레는 부지런한 새에게 잡혀먹힌다. 청소년은 벌레일지도 모른다. 노인에게는 노인의 삶이 있고 청소년에게는 청소년의 삶이 있다. 청소년에게 충분한 잠을 허락하자. 모든 중고등학교가 경기도처럼 9시에 등교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경기도의 중고등학교 등교 시간이 10시로 늦춰지길 바란다.
서울특별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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