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당시 새누리당 황우여 원내대표가 주도한 ‘국회선진화법’이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이 과반을 획득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한 상황에서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대 총선에 예상과 달리 과반을 확보한 새누리당은 입장을 뒤집고 국회선진화법을 ‘식물국회’의 주된 요인으로 꼽으며 부단하게 개정을 주장했다. 쟁점법안 통과에 재적 5분의 3 찬성이란 의결정족수를 명시한 조항이 다수결을 규정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다. 결국 지난해 1월 정의화 국회의장을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으나, 최근 헌재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제 여소야대의 여당과 야당의 입장이 바뀌었으나, 국회법을 탓할 명분은 사라졌다.
정부는 ‘상시청문회법’이라고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소관 현안을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는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통제 수단을 신설한 것이어서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행정부와 기업에 과도한 업무와 과중한 비용 등 비능률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적시했다. 이러한 명분의 타당성 여부 이전에 절차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재의 요구의 형태로 행사된다. 헌법에는 거부권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19대 국회에서 재의 요구된 법률안에 대해, 20대 국회에서 재의에 부칠 수 있는지에 대해 정치적 입장과 학설에 따라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19대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연속성이 없는 20대 국회에서 재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19대 국회 때 재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임시국회를 소집하려면 3일의 공고기간이 필요하다. 임기는 5월 29일 종료된다. 재의 요구는 27일 이루어졌다. 원천적으로 국회 소집 자체가 불가능하다. 재의를 요구하려면 재의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시간을 고려했어야 했다. 재의 요구가 헌법 53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 자체를 위반하지 않았으나, 이는 형식적 절차만 충족시킬 뿐이다. 실질적 민주주의(substantial democracy)는 찾아볼 수 없다.
‘소관 현안 조사’가 국정을 마비시킨다는 추론에 대한 근거가 희박할 뿐 아니라, 여야가 합의한 법안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없다. 민주주의라는 기본 개념에 대한 인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거부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이는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이 현저하게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했다는 국민의 광범한 합의가 존재할 때 최소한으로 행사해야 한다. 이번 거부권 정치는 갈등을 유발할 뿐이며, ‘좋은 정치’가 아니다. 패도정치 시대 책사(策士)들의 묘수 정치요, 정쟁을 유발하는 ‘나쁜 정치’다.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최소한의 정치윤리나 금도를 벗어난 ‘꼼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야의 쟁점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이익의 충돌이 극대화될 때 이에 대한 대처 방식이 협치와 소통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번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정부와 청와대는 과도한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국회 선진화법은 국회 마비법으로, 상시 청문회법은 행정부 마비법으로 접근하는 논리는 협량(狹量)하다.
여야의 합의로 통과된 법안에 대해 청와대·정부와 보조를 맞추는 새누리당에게서 국회의 일각이라는 인식은 찾을 수 없다. 집권당이 청와대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대위와 혁신위의 분리 운영이 친박의 조직적 반발에 의해 좌절되고, 친박 다수파의 뜻대로 특정계파의 패권주의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듯하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여야의 적대적 상황을 연출해서 특정 계파의 정치적 결속과 패권주의에 안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권력운용방식의 획기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20대 국회가 ‘협치’와 ‘대치’의 갈림길에 섰다.
최창렬 용인대 중앙도서관장ㆍ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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