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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화물선 여행…준비할 서류만 스무고개였다

입력
2016.05.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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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선을 타려는 이들에게 던지는 간증 혹은 경고장

부산 신항에서 화물선의 출항을 알리는 깃발. 나 이제 떠나요.
부산 신항에서 화물선의 출항을 알리는 깃발. 나 이제 떠나요.

출국 예정 3개월 전, 탕탕은 이미 답을 쥔 조커 웃음으로 물었다.

"중남미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어떤 걸 택할래?"

"비행기 말고 무조건."

화물선이란다. 실크로드를 횡단한 후 인터넷 서핑을 낙으로 삼던 탕탕이 한 외국 블로그에서 발견한 정보였다. 본능적으로 끌렸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업무의 활자가 이미 파도가 되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우린 장기 여행이 주는 가능성에 아낌없이 몸을 던질 용의가 있었다. 자, 잉여의 쾌락에 자신을 투척하라. 누가 보면 '버리는 시간', 그곳이 바다라면 얼마나 낭만적이겠는가. 하지만 그 낭만, 타기 전에 다 꺼졌다.

한국의 용감한 여행자가 이 루트를 뚫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못해봐서 서러우니까.
한국의 용감한 여행자가 이 루트를 뚫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못해봐서 서러우니까.
승선한 CMA CGM 화물선이 정박하는 나라별 정류장.
승선한 CMA CGM 화물선이 정박하는 나라별 정류장.

애초 기획한 여행은 이스트를 넣은 듯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미국 LA로 입항해 뉴올리언스에서 재즈로 감성 폭발을 경험한 뒤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의 원조 루트(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남하하는 루트)를 따라 내려가겠다는 것. 돌이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다. 화물선을 통한 미국 입국 조건 중 하나가 어이없게도 ESTA(무비자 여행증명)가 아닌 B1/B2(상용·취업 전용) 비자였다. 상황을 보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마이너스 통장 인생에, 싱글이다. 미국 가서 눈먼 남자와 눈이 맞아 자리잡을 것으로 생각하기 딱 좋은 롤모델로, B1/B2 비자를 받기에 가장 확실한 결격사유 조건을 갖췄다. 탕탕은 또 어떤가. 고국을 떠난 지 2년째,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진행해도 될까 말까 할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인생, 쉽게 가기로 했다.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중남미의 첫 행선지 멕시코로 바로 넘어가기로 합의했다.

화물선 데크에서 이 장면을 보고 나서야 안도한다. “이제 너와의 밀당은 끝이야!”
화물선 데크에서 이 장면을 보고 나서야 안도한다. “이제 너와의 밀당은 끝이야!”

선택은 쉬웠으나 앞길이 막막했다. 여행자는 '갑'인 줄 알았건만, '을' 인생의 연장선이었다. 에라, 원양어선을 타고 불법 입국해버릴까? 화물선은 실상 화물이 상전이다. 애초에 승객을 위한 크루즈가 아니다. 승선하려면 (공식적으로) 3개월 전까지 예약, 결재를 마쳐야 했다. 그렇다고 제때 태워주느냐, 섭섭하게 승선일조차 종잡을 수 없다. 바다가 거친 파도로 투정하거나 수출입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이 '화물님' 스케줄에 맞춰야 한다. 준비할 서류는 스무고개였다. 송환 기능이 포함된 영문 보험 있니? (내 몸이 보험인데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30일 이내 네 몸 싹 훑은 건강 진단서 낼래? (네가 여행 경비를 아예 거덜 낼 참이구나.) 한국인은 멕시코 출국 티켓도 끊어야 해. 네 카드로 결제하면 추가 비용도 있는 거 아니? (탕탕은 왜 아닌데?!?!) 예측 불가능한 문제가 발생해도 선박 측엔 책임이 없다는 면죄부형 문서에 수없이 사인하기까지, 난 이 모든 과정이 화물선 여행을 방해하는 모략이라 확신했다.

화물선에 탄 자에게는 때론 호수처럼 고요하고, 때론 용암처럼 솟아오르는 바다에 감읍할 자격이 주어진다.
화물선에 탄 자에게는 때론 호수처럼 고요하고, 때론 용암처럼 솟아오르는 바다에 감읍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경고한다. 화물선을 타기로 마음 먹었다면 독기에 찬 인내와 억겁의 시간이 필수다. "그냥 비행기 타버릴까?"란 생각을 잠들 때마다 하게 된다. 결국, 이 게임의 승자는 넉살과 배려와 끈기의 소유자. 한번 타고나면, 화물선의 스케줄에 어떻게 하면 싱크로나이즈할 수 있을지 겸손한 올인 자세를 취할 것이다. 자, 다음 편에 고막 떨리는 실전으로 들어간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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