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나가이 다카시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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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나가이 다카시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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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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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다카시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피해자를 언급하려면 나가이 다카시(永井隆ㆍ1908~51)를 빼놓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이던 1945년 8월 7일 미군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고, 이틀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발의 원폭을 떨어뜨렸다. 원폭은 나가사키 의대 조교수였던 나가이가 근무하던 대학병원에서 700m 떨어진 곳에 떨어졌고, 나가이는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전문 분야인 방사선 치료 연구 도중 피폭돼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가이는 병원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았고, 겨우 숨을 돌리고 사흘 만에 돌아온 집에서 그는 폭격으로 불에 타 앙상한 뼈만 남은 아내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또 다시 오열해야 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나가이는 구호 활동과 지역 재건에 나섰고, 병세가 짙어져 더 이상 거동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환자 치료에 전념했다. 그가 쓴 환자들을 위한 병상일지는 이후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돼 원폭 피해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귀중한 자료가 됐다. 원자폭탄의 참혹성을 알린 최초의 작가라는 명성에 힘입어 헬렌 켈러 등 세계 유명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병세가 악화하자 대학을 그만두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에서 따온 뇨코도(如己堂)라는 집을 짓고 요양과 집필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나가이 다카시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을 따서 지은 뇨코도(如己堂).

이런 나가이의 사연이 한국인에게 조금 불편한 진실이 될 수는 있겠다. 원폭 투하의 빌미를 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생략된 채 지구 유일의 피폭국가임을 부각하는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

반면 원폭 피해자 나가이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워낙 부각되다 보니 반전주의자라는 측면에서 나가이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적다는 사실은 아쉽다. 나가이는 숨지기 전까지 뇨코도에 기거하며 집필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라는 저서를 통해 일본 평화헌법의 가치와 의미를 역설했다. 자신의 두 아들 세이치와 카야노를 빗대, 일본 국민에게 남긴 이 글에서 나가이는 평화헌법을 “전쟁의 참화에서 눈을 뜬 진정한 일본인의 목소리”라고 정의했고, “일본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따라 전쟁 포기 조항을 삭제하자고 외치는 자가 나와 일본재무장을 끌어내려고 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나가이는 그러면서 “세이치여 카야노여, 비록 최후에 두 명이 남아 어떤 비난이나 폭력을 받더라고, 굳건히 ‘전쟁 절대반대’를 외쳐다오. 비록 비겁자라고 멸시당하고 배신자라고 두들겨 맞는 한이 있어도 ‘전쟁 절대반대’를 고수하라”고 당부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주도하는 일본의 재무장을 예측한 듯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어 놀랍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종전 71년 만에 피폭지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행보이며, 결코 사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전범국가 일본은 상당 부분 면죄부를 얻은 셈이 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없는 세계’를 말하면서도 미일 동맹을 강조하며 일본의 재무장에 힘을 실었다. 미국 대통령 최초의 피폭지 방문을 이끌어 낸 아베 총리는 지지도 상승을 기반으로, 안보법제 관련 법 정비는 물론 궁극적인 목표인 평화헌법 개정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침략국가로서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보통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전쟁에 개입하는 일도 머지 않았다. 참혹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재차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려는 지금의 일본.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오는 지금의 상황을 보며 나가이는 지하에서 통탄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한창만 전국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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