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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크렘린 방공망 뚫은 세스나기

입력
2016.05.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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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28일 저녁 무렵, 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상공을 선회하던 4인승 세스나기가 크렘린 궁 앞 붉은광장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철통이라 여겨지던 방공망을 뚫은 경비행기의 조종사는 놀랍게도 19세의 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였다. 여자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몰려온 인파들에 사인을 해주다 KGB에 전격 연행됐다.

소련 당국은 발칵 뒤집혔다. 서방세계의 경비행기가 최고 심장부인 크렘린 궁의 안방에 내렸으니 냉전시대 소련의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진 건 당연했다. 1만여 개의 레이더와 요격전투기 및 지대공 미사일은 조그만 프로펠러 경비행기 앞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 것이다.

고향 함부르크 비행클럽에서 조종을 배운 루스트는 임대한 단발 세스나기로 핀란드 헬싱키를 떠나 교신을 끈 채 무작정 동쪽으로 향했다. 자신의 비행이 동서 양 진영의 평화를 위한 가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핀란드 교통 관제탑은 그가 추락한 것으로 추정했다.

저공 비행을 하던 세스나기가 소련 영공으로 들어서자 미그 23기 전투기가 다가왔지만 조종사들은 지상관제소에 스포츠항공기라고 보고했고 지상에서 진짜 비행기인지 커다란 새인지 헷갈리는 사이 루스트의 세스나기는 구름 속으로 사라진 뒤 모스크바까지 날아갔다.

19세 청년의 무모했던 비행은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개혁, 개방정책에 반대하던 소콜로프 국방장관 등 군부 핵심을 물갈이했고 이는 결국 독일 통일 및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는 냉전 시대의 종말을 가져왔다.

영공 침범 등의 혐의로 모스크바 교도소에서 14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친 후 영웅이 되어 귀국한 그는 현재 투자자 겸 거물급 포커선수로 활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청년 루스트(오른쪽)가 몰고 온 세스나기가 크렘린 궁 붉은 광장에 착륙해 있다.

손용석 멀티미디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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