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체온
쑨거 지음ㆍ김항 옮김
창비 발행ㆍ252쪽ㆍ1만4000원
“중국의 진짜 얼굴을 알려달라”
日 잡지 요청에 中 교수 연재
산보운동ㆍ농민공 가수 사례 들며
서구 담론에 가려진 속살 드러내
유머 섞인 글 따뜻하게 읽히지만
‘중국은 다르다’ 주장 어용 우려도
‘체온’이란 표현이 입에 착 감긴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게 근대란 일종의 수입품이다. 해서 이들의 근대엔 늘 ‘몇 시인가?’라는 질문이 따라다닌다. 동아시아가 서 있는 지점을 더듬어보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시간이란 것 자체가 어떤 기준점에서 뻗어나가는 직선적 이미지인지라 자꾸 대체 ‘몇 시인가’라고 되묻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감정적인 반문을 낳는다. “그러는 댁은 대체 몇 시이길래 자꾸 나에게 몇 시냐고 되물으시오?”
그래서 기준점에서 어떤 범위를 표시하는 ‘체온’이라는 표현 덕에 우열비교를 떠나 중국 현장을 살펴보는, 비유하자면 내재적 접근의 느낌이 훨씬 강하다. ‘베이징 편지’라는, 다소 밋밋한 원서 제목을 아주 적절하게 잘 바꿨다 싶다. 창비 관계자는 “저자, 번역자, 출판사 모두 고심 끝에 합의한 제목”이라 전했다.
‘중국의 체온’은 쑨거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가 일본 체류 중 중국의 진짜 얼굴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본 잡지에 연재한 글들이다. 쑨거는 루쉰을 공통분모로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일본 지성을 파고 들었던 학자. 일본으로선 최적의 필자였을 것이고, 쑨거로서는 ‘대체 중국 왜 그러는데?’라는 질문에 답할 절호의 찬스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에서 쑨거는 황하의 잉어 얘기를 꺼낸다. 황하라는 그 혼탁한 물에서 잡은 것이었음에도 “깨끗한 강에서 자란 보통 잉어에서 나는 비린내도 없었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식감”이 일품이었다고 했다. 황하의 혼탁한 진흙탕이 역설적으로 충분하고 다양한 영양분을 공급해서다. “달콤한 단순화”를 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그 진흙탕 속에서 맛있는 잉어도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얘기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이 잉어는 현대 중국에 대한 희망을 섞은 은유다.
사실 중국에 대한 전망은 긍정, 부정 모두 자기들이 보고 싶어하는 바의 틀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가령 중국을 찬양하는 이들의 속내를 보면 딱히 중국 그 자체가 대단히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미국에 대한 반대심리가 강하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조반니 아리기 같은 서구 좌파 이론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지금의 중국이 자본주의적으로 번영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여러 역사적 요인들을 열심히 찾아내서 중국을 두둥실 띄우는데 힘을 모은다. 어서 빨리 미국 중심 세계체제를 끝내달라는 희망을 슬쩍 끼워 넣은 채 말이다.
반면 “하드파워는 몰라도 소프트파워는 없지 않느냐”는 다소 고상한 문구로 표현되는 비관론은 중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인 미개함을 집중적으로 거론한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열심히 뛰어서 돈은 좀 벌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밖에 딱히 내세울 건 없지 않느냐는 얘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고상했던 곳이 어디 있던가. 다들 시작은 그렇게 미개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당장 우리만 해도 지금 이 정도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이없는 일을 겪었던가.
일본의 요청에 따라 글을 쓴 것이니 쑨거가 이 책에서 애써 방어하는 쪽은 일단 비관론이다. 가벼운 에세이 풍으로 쓴 글이니 응답은 유머스럽다. 가짜가 난무한다는 중국을 변호하기 위해 해적판과 ‘산채(山寨)판’을 구분했다. 산채판은 수호전의 산채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딱 잘라 잘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돈만 노리고 마구잡이식으로 베낀 해적판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품질이 좀 떨어져도 싼 가격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니 반자본적(!)이고 친서민적(!)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낄낄거릴 만한 논법인데, 무조건 이리 둘러대는 것만은 아니다. 질서, 계약 같은 근대적 질서가 무시당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 정치사회 형성의 가장 큰 난제”라고 선선히 인정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나 정치적 자유의 문제다. 쑨거는 2007년 샤먼시의 ‘산보(散步)운동’을 끌어온다. 화학공장 설립을 반대하기 위해 시민들은 시장과 만나고 싶다며 노란 리본을 달고 걸어 다녔다. 시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곧 산보운동은 상하이, 청두, 충칭 등으로 번져나갔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경제적 불균형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농민공’ 문제에 대해서도 쑨거는 주지원의 사례를 끌어온다. 우리로 치면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인 ‘스타의 길’을 통해 잘 나가는 가수가 된 주지원은 농민공의 투박함을 버리지 않았다. 출연 요청이 있으면 노래만 딱 부르고는 고향으로 가 닭, 오리, 개를 기르는 생활로 되돌아간다. 미래 중국의 희망을 이런 농민의 심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를 하고픈 게다.
자민족, 자국가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쓴 책이어서 따뜻하게 읽히면서도, 그럼에도 이런 논의가 자칫 ‘어용’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우려된다. 쑨거도 서구적 근대와 다른 중국만의 무엇을 강조하려다 보니 ‘포스트모던’을 자꾸 끌어오는데, ‘서구적 근대와 다른 길을 가려 한다’거나 ‘서구적 근대를 뛰어 넘겠다’는 얘기가 잘못 쓰일 경우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이미 너무도 또렷하게 잘 봐왔다.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은 서구적 근대에게서 동아시아를 보호하겠다는 논리를 폈다. 멀리 갈 것 없이 남북한이 공히 내걸었던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그냥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하기 싫다는 얘기였을 뿐이다. 온갖 멋들어진 ‘포스트모던’이 헤매는 지점도 따지고 보면 대략 이 언저리다.
그럼에도 쑨거가 온통 흙탕물인 이 중국이 맛있는 잉어가 되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까닭은 “숱한 왕조 붕괴에도 ‘중국’은 붕괴된 적”이 없으며 이는 “중국인이란 국적을 의미하기보다 생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쑨거의 이 말이 어떤 의미로 와 닿는가는 중국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라기보다, 중국에서 읽어내는 우리의 얼굴일 게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