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지?” 화제의 영화 ‘곡성’을 보고 난 뒤의 첫 소감이었다. 머릿속엔 느낌표보다 물음표가 더 많이 남았다. 왜 마을 사람들이 이상해지고 살인사건이 계속 일어나는지부터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정체가 무엇인지, 일광(황정민)과 무명(천우희)은 또 어떤 존재인지, 이들은 서로 어떤 관계이며 주인공인 종구(곽도원)와는 왜 그렇게 얽히고설키었는지 납득이 될 듯 말 듯 하다가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하루 정도 지나서야 나는 이 모든 혼란의 원인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영화 속의 문법은 일상의 문법이 아니었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우리 일상의 문법과 상식과 논리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현실에 없는 존재(좀비나 귀신, 악령 등)를 다루는 영화는 그 자체의 문법을 따라야 한다. 좀비는 왜 죽지 않는지, 악령은 어떻게 저런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는 기본적으로 그 작품 속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영화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저런 변신로봇이 외계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다 치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곡성’의 마력은 일상의 익숙한 문법이 아닐 수 없는 극적인 전개가 비일상의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도약하는 데 있다. 그 도약이 억지스러운 결과였다면 ‘곡성’은 뜬금없는 삼류에 머물렀을 것이다. 악령이나 절대악이 존재하는 세상의 법칙은 지금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는 일상의 법칙과 다르다. 후자로 전자를 이해하려고 들면 혼란만 늘어난다. 나의 경우가 꼭 그랬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미끼를 물었다”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는 어쩌면 일상화법에 길들여진 나 같은 관객을 향한 경고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 행성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이라 생각했던 현상들은 과학의 발전으로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과학과 이성과 상식이 작동을 멈춘 곳에서는 악령과 귀신이 다시 등장하곤 한다. 가습기 살균제로 둘째(태아)와 셋째 아이를 잃은 한 여성은 한때 자신에게 귀신이 씌었나 하는 의심을 했다고 한다. 정부도 업체도 전문가도 이 사회의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니 그 자리를 귀신이 꿰찬 것이다. 과학적인 설명이나 납득할만한 진상조사, 대책마련 등도 없고 여전히 비슷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의 주체가 기업이든 정부든, 아니면 사악한 악령이든 별 차이가 없다. 자기 배만 채우겠다는 악덕기업이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나 몰라라 하는 정부가 악령의 실체라 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귀신에 홀린 것만 같다. 며칠 전 강남 한복판에서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이유 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은 오히려 새로운 표적이 되기 일쑤다. 과학이니 상식이니 하는 말들은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악령이 등장하는 영화와 너무나 닮았다.
차라리 사악한 악령이 문제라면 용한 무당이라도 불러다 굿이라도 해 보겠지만, 영화에서처럼 믿고 의지하던 무당마저 한패인 것이 우리 현실에 가깝다. 악령이 지배하는 ‘헬조선’은 그렇게 완성된다. 스크린 밖의 악령이 더 무서운 현실, 힘없는 사람들의 우는 소리는 오늘도 멈추질 않는다.
현실의 악령들은 우는 소리마저 부정한다. 악에 맞서는 첫걸음은 우는 소리, 곡성부터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일이다. 여기 아픈 사람이 있음을, 뼈에 사무치는 슬픔과 통한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김탁환 작가 등은 세월호 유족들의 곡성을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에 담았다. 강남역 사람들은 추모의 쪽지를 무수히 남겼다. 그렇게 곡성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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