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맞은 STX조선 자율협약 과정
정부 압박에 채권단 마지못해 지원
“말만 자율, 사실상 강제 협력이었다”
수조원 부실 대우조선에 돈 붓기
“STX 전철 밟을 가능성” 우려 커져
부실 방치한 산은 책임 먼저 물어야
지난 2013년 8월부터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받아온 STX조선해양이 6조원 안팎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받고도 3년 만에 법정관리 문턱에 들어서면서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연명 식 지원에 대한 경계감이 커지고 있다. 당국과 정치권의 압박에 채권단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원에 나선 STX조선이 결국 파국을 맞은 것처럼, 충분한 책임 추궁과 냉정한 판단 없이 대우조선을 무턱대고 지원할 경우 향후 STX조선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2013년 4월 STX조선이 자율협약을 신청할 당시 채권단 사이에선 지원 여부를 두고 이견이 상당했다. 문어발식 사업확장, 저가 수주 지속으로 이미 2009년부터 수익성에 경고등이 켜진 상황이었다. 자율협약을 신청하기 직전 연도 순손실이 7,820억원에 달했다. 채권은행 한 관계자는 “당시 채권단 안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부는 “STX조선해양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 죽일 수 없다”며 자율협약을 종용했다. ‘낙하산’으로 산업은행에 입성한 홍기택 당시 산은 회장은 “면책 약속을 해달라”고 버티다 결국 굴복, 채권단 압박에 동참했다.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STX조선의 구조조정에 대해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채권단에도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STX조선 협력업체들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으로 몰려와 ‘STX조선해양 경영 정상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당시 이들은 “STX조선해양이 조업을 중단하면 2만여 근로자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져 국가경제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며 채권단을 종용했다. 이름만 자율협약이었을 뿐, 시장 원리는 뒷전에 밀린 채 정부와 산업은행 등의 압박에 굴복한 결과였던 셈이다. 한 금융권 임원은 “말만 자율이었지 사실상 강제 협력이나 다름 없었다”며 “당국이 사실상 선을 정해놓은 상황에서 채권단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STX조선이 자율협약을 신청하자마자 6,000억원을 지원하고 바로 그 다음달 추가로 2,500억원의 운영자금을 대줬다. 이어 그해 8월 STX조선의 존속가치(2조1,000억원)가 청산가치(1조1,900억원)보다 더 높다는 실사 결과를 바탕으로 3조원 규모의 지원안을 마련했다.
대우조선도 지금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당국과 채권단은 지난해 5월 대우조선이 수조원의 부실을 감췄다는 걸 고백했지만 ‘메스’를 들이대는 대신 산업은행을 통해 4조2,0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대우조선이 올해 100억달러 상당의 일감을 수주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이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기까지는 불과 5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대우조선은 올 들어 단 한 척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했다. 정부 고위 인사는 “대우조선은 고용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너무 커서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며 당시 결정에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음을 시인했다.
대우조선은 총체적으로 구조조정 방안을 재검토해 다음달 중 시나리오별로 자구계획을 다시 마련한다. 현재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경영정상화 발표 이후 2조3,000억원을 포함해 총 2조6,800억원의 지원을 받았다. 앞으로 9,000억원 정도의 추가 유동성 지원과 6,200억원 수준의 유상증자가 이뤄질 예정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수주 절벽이 한동안 해소되지 않을 경우다. 일감이 떨어지더라도 고정비는 계속 지출되기 때문에 대우조선은 고정비 부족분 해소를 위해 채권단에 추가 자금지원을 요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산은 관계자는 “아직 유동성을 추가로 지원하기로 한 금액이 1조원 이상 남아 있는 상황이라, 추가 자금 지원이 필요한 상황까지는 가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그때 가서 다시 검토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우조선이 STX조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채권단이 냉정한 잣대에 따라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한다. 하지만 지금 대우조선 구조조정의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부실을 방치한 당사자인 산업은행이라는 점부터 넘어야 할 벽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산업은행이 책임져야 한다”고 나선 것처럼 철저한 책임 추궁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들이 쏟아지는 이유다. 그 후에 어떤 부실을 얼마나 털어내고 얼마를 추가 지원하면 살아날 수 있는지 냉정한 판단 하에 대우조선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재준 인하대 교수는 “대우조선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STX조선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정치적인 논리가 개입돼서는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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