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 뒤편에는 마로니에 노거수 두 그루가 있다. 1912년 서울 주재 네덜란드 공사가 회갑을 맞은 고종황제에게 선물한 묘목이 자란 것이다. 고종은 당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을 파견한 것과 관련해 일제의 압력을 받아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덕수궁에서 유폐에 가까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고종에게 네덜란드 공사가 마로니에 묘목을 선물한 건 만국평화회의 때 주최국 네덜란드가 도움을 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 우리나라에 최초로 심어진 마로니에인 이 나무들은 이달 초순 우람한 수형(樹形) 전체가 꽃송이로 뒤덮여 장관을 이뤘다. 100년 넘게 왕성한 생명력을 이어오며 고종의 한을, 역사의 아픔을 증언하는 듯했다. 덕수궁이 위치한 서울 중구 정동에는 이처럼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숱한 사연을 간직한 역사적 유물과 유적들이 즐비하다. 을사늑약 체결 현장인 중명전과 고종 황제가 한 때 피신했던 구 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해 물밀듯 밀려 온 서구 문물의 선두에 섰던 교회와 학교도 수두룩하다.
▦ 정동 일대 근대문화 유산을 돌아보며 역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축제가 27ㆍ28일 열린다. 서울 중구청이 주최하는 이 행사의 명칭은 정동야행(貞洞夜行). 정동의 낮 경관도 멋있지만 요즘 밤은 한층 운치가 있다. 야화(夜花, 밤에 꽃피우는 문화시설), 야로(夜路, 밤에 걷는 역사 길), 야사(夜史, 역사체험), 야설(野設, 거리 공연), 야경(夜景, 야간 경관), 야식(夜食, 야간의 먹거리) 등 6가지 축제 테마를 모두 밤과 연관 지은 이유다. 축제 기간 덕수궁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구 러시아공사관 등 29개 기관들이 밤 늦게까지 문을 연다.
▦ 초여름 밤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열리는 음악회(27일 오후 7시30분 ‘봄여름가을겨울’의 콘서트, 28일 오후 7시30분 금난새 지휘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는 정동의 싱그러운 밤공기와 잘 어울릴 것 같다. 정동 탐방 프로그램 ‘다 같이 돌자 정동 한 바퀴’는 전문 해설사가 함께 하며 구 러시아공사관_이화박물관_정동제일교회_배재학당역사박물관_서울시립미술관(구 대법원청사)_덕수궁 중명전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바쁜 일상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정동의 밤길을 거닐어 볼 만하다.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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