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자 소설가인 이제하의 전시회 ‘밤과 말의 기억전’에서 우리 골목을 담은 그림 한 점을 보았다.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이 동네에 작업실을 얻어 한동안 지낼 때 그린 그림이다. 선생은 빈집이 많은 우리 동네의 을씨년스런 분위기에 큰 매력을 느꼈고,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업실을 마련한 뒤엔 몰입해 창작할 수 있는 타이밍에 근접한 것처럼 보였다. 바로 옆에 사는 내가 자주 찾아뵙기는커녕 차 마시는 시간도 빼앗지 않으려 했던 것도 금쪽같은 창작 에너지에 누수 현상이 생길까 봐 겁을 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가 이곳에서 얻은 그림은 딱 한 점뿐이다. 세 들어 살던 집이 갑자기 팔리는 바람에 대학로 근처로 이사를 해야만 했던 것. 쓰러져가는 빈집들이 늘어선 어두운 골목을 담은 ‘사직동 풍경’은 새싹이 돋는 봄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그림이다.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에 경쾌한 리듬감을 담은 피카소의 ‘부케’처럼. 화가가 우중충한 우리 골목에서 그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분명 그가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뜻할 것이다. 나보다 23년 먼저 이 세상에 온 그는 아직도 인터넷 사이트에 소설을 연재 중이고, 밤을 새워 놀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다. 제대로 한 번 일해 보지도 못했고, 제대로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내게 그는 늘 경이로운 존재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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