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우 前 대표 “인수사가 하겠지”
흡입독성 실험 의뢰하지 않아
외국인 대표 떠나고 2달만에 복귀
제품 판매 후 별일 없어 넘어간 듯
연구소장 사전구속영장 청구
‘안방의 세월호 참사’로 불리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역시 안전불감증과 무사 안일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드러났다. 검찰은 옥시레킷벤키저(옥시) 관계자들에게 사기 혐의를 추가 적용할 방침을 세웠다.
25일 검찰 등에 따르면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의 원료를 프리벤톨R80에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국내외 전문가들로부터 “흡입독성 실험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2000년 10월 중순부터 제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판매가 시작된 지 한 달쯤 지난 후 옥시는 미국과 영국의 연구소 두 곳에 급성 흡입독성 실험이 가능한지 문의해 두 곳에서 모두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듬해 2월 실험을 의뢰하는 기안 문서까지 작성됐지만 옥시는 실험 없이 제품 판매를 강행했다. 흡입독성 실험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그 동안 ‘비용 절감 차원’, ‘당시 옥시 대표의 자리 보전 목적’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검찰 수사로 드러난 실제 이유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옥시가 레킷벤키저에 인수ㆍ합병된 2001년 4월 외국인 대표가 신현우(68ㆍ구속) 전 대표의 자리를 대신할 예정이었다. 신 전 대표는 “인수하는 회사(레킷벤키저)가 알아서 하겠지. 떠나는 마당에 이것까지 해야 하나”고 생각해 실험을 의뢰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흡입독성 실험을 기안한 연구소 규모도 축소되면서 혼란을 겪었고 연구진들도 손을 놓았다. 회사 인수 후 새로 부임한 외국인 대표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어 달 만에 그만뒀고 신 전 대표가 다시 대표로 부임했다. 회사로 복귀한 후 실험을 실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신 전 대표는 검찰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제품 판매 후 몇 개월이 지나도 별 일이 없다 보니 그냥 넘어간 거 같다”며 “무사안일, 무책임, 무관심이 겹쳐져 참극이 빚어졌다.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신 전 대표를 비롯한 옥시 관계자들에게 사기죄를 적용할 방침을 세우고 대상자를 선별하고 있다. 신 전 대표는 14일 업무상 과실치사 및 과실치상, 표시ㆍ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이미 구속됐다. 검찰이 사기죄를 추가 적용하기로 한 것은 PHMG에 대한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아 유해성 여부가 불분명한데도 ‘인체에 무해’ ‘아이에게도 안심’ 등의 문구를 제품 용기에 기재한 것이 소비자를 ‘기망’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품을 광고하는 수준을 넘어 제품판매를 위해 소비자를 속일 고의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통상적인 거래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의 성실의 의무에 위배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기죄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속이거나(기망) 소극적으로 고지할 의무가 있는데도 알리지 않아 이에 속은 타인으로부터 재물을 받거나 재산상의 이득을 취한 경우 적용된다. 검찰은 옥시가 허위ㆍ과장 광고를 통해 유해성 여부를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재산상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옥시는 살균제를 팔아 50여억원을 벌어들였다. 사기로 인한 이득이 5억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된다.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진다. 이에 따라 신 전 대표 등에게 사기죄까지 적용돼 유죄가 확정되면 형량은 대폭 높아질 전망이다.
한편 검찰은 이날 업무상 과실치사 및 과실치상, 표시ㆍ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옥시 현 연구소장 조모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26일 홈플러스 생활용품팀 직원 김모씨와 전 호서대 연구원 문모씨를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한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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