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히로시마에 간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는 불투명하지만 “(원폭)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다”고 공언한 만큼 사죄로 비칠 언행은 극도로 삼갈 것이다. 그가 바치는 꽃다발에는 사과의 뜻이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오바마는 17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폭지를 방문하고도 사과하지 않은 원폭 투하국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 같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환영한다. 사과는 기대하지도 않는다고도 한다. 원폭 피해국이면서 동시에 패전국으로서 오랫동안 대미 종속에 순화됐던 일본 특유의 모순적인 감정이다. 한국인들의 마음도 어수선하다. 핵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오바마의 이상엔 공감하지만, 이번 방문이 자칫 일본의 가해 책임을 가리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선거철을 맞은 미국에서는 새삼스레 원폭투하의 정당성을 되새기는 분위기이다.
오바마는 정말 히로시마에 사과할 일이 없는가. 일제의 집단적 광기가 저지른 죄악이 아무리 크더라도 미국이 대량살상무기인 원폭을 투하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을까.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자격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 이상 당연히 이에 대한 정치적 견해, 특히 원폭 투하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는 게 순리인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이것을 생략한 채 비핵화와 세계평화라는 미국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장밋빛 미래만을 내놓을 요량이다. 그의 방문이 숱한 억측을 낳는 이유이다.
오바마의 ‘사과 없는’ 히로시마 방문은 어쩌면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가장 원했던 모습일 것이다. 승전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행여나 원폭 피해자에게 사과라도 표명하게 되면 패전국이자 가해국인 일본 또한 아시아 각국과 미국에도 사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피폭의 참화를 초래한 원인 제공자면서도 자국민 피해자에게조차 사과한 적이 없다. 이미 했던 사과조차 어떻게든 없던 일로 만들려 기를 쓰는 아베 정권으로선 역설적으로 오바마의 사과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사과 없는’ 오바마의 피폭지 방문은 결국 일제의 음침한 과거사를 덮어주는 미일 합작 이벤트로 끝날 공산이 크다. 아베는 위령비에 고개 숙여 헌화하는 미국 대통령을 보여주면서 아시아에 대한 사과를 거부해온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미안한 국가들’(Sorry States)이 손을 잡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서 칼춤을 추는 꼴이다.
이런 부조리극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도 마뜩잖다. 외교부는 오바마가 평화공원의 위령비에서 불과 200m 떨어진 한국인 위령비에도 방문하느냐는 질문에 “우리의 관심사를 미국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외교부가 생각하는 ‘우리의 관심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촌에서 일본에 이은 제2의 원폭 피해국으로서 당당하게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겠다는 자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식민지 백성으로 일제의 전쟁에 동원돼 미국의 원폭 공격을 받아 숨진 2만여명의 피해자를 안고 있는 한국이야말로 가해국 미국과 일본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기야 지난해 일방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합의해놓고 피해자들 간의 편 가르기에 열심인 한국 정부가 ‘우리의 관심사’를 제대로 짚어내고 ‘피해자 일본인’과 ‘가해자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구분하는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할 리 만무하다.
오바마는 히로시마에 가는 이유에 대해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에 말려들어 엄청난 고난을 겪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수한 원폭 피해자들을 만들어낸 가해국 대통령은 희생자 위령비를 찾으면서도 무례하게 딴소리를 했다. ‘반성’은커녕 ‘인정’조차 거부하면서 ‘아시아 회귀’와 핵 없는 세계를 말하는 미국과 여기에 장단을 맞추는 일본에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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