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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나’의 생존, ‘다름’과의 공존

입력
2016.05.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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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2만 개 이상의 부품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럼, 사람을 구성하는 부품은 몇 개일까. 물론 이 물음은 잘못됐다. 유기물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분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사고실험을 해보자. 장기나 근육, 골격 단위로 나눠본다면 얼마나 될까. 더 미세하게 따져 세포 차원에서 헤아려본다면.

정말 궁금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다. 이른바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얼마이든, 그것들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는지를 따져보자는 취지로 던진 물음이다. 사람인 나는, 구성요소가 수천억 개라 할지라도 그 시원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이다. 적어도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는 그러하다. 부모가 DNA를 합성해주면 나는 모태에서 열 달 가까이 자란 뒤 세상에 나온다.

그 후 모유나 분유를 마시다 이유식 등으로 소화력을 키운 후 어른들의 음식을 접한다. 그러면서 나는 부모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개체로 선다. 이 과정에서 나를 구성하는 것은 온통 나의 바깥에서 들어온다. 부모를 남으로 치기엔 사뭇 송구하지만, 내가 아님은 분명하다. 나의 기원인 DNA 자체가 나 밖에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다. 모태에선 탯줄을 통해, 태어난 후엔 입을 통해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을 외부로부터 섭취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모든 것이 나 바깥에서 들어온 셈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 행세를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정신으로 대변되는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신의 형성과 성장에도 외부에서 취함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형성되거나 성장될 계기가 확보될 수 없어, 인문이니 문화니 하는 것들은 아예 태동조차 못 하게 된다. 인류는 동물과 다름을 절대로 주장하지 못하는 단계에 그저 머물러 있었을 터이다.

이렇듯 나는 나 바깥의 것들이 취해짐으로써 생겨난 존재다. 불가에선 사람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두가 뭔가 다른 것에 기대어 생성됐다고 본다. 유가 또한 만물은 하늘이 낳아주고 땅이 길러줬다고 본다. 사람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 자족적 존재로 빚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나 바깥에서 필요한 바를 갖고 들어와야 비로소 생명 유지가 가능한 존재였음이다.

하여 우리는 살기 위해선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옛적 제(齊)나라에 전(田) 씨 가문이 있었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권세를 몇 대째 유지했던 권문세가였다. 하루는 먼 길을 떠나기에 앞서 무사안녕을 비는 제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러자 도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귀한 물건을 제단에 바치며 전 씨 눈에 들고자 했다. 이를 바라본 전 씨는 “하늘이 오곡을 번식하게 하고, 물고기와 새를 자라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쓰게 하는구나!” 하며 기꺼워했다.

이때 한 아이가 불쑥 나서더니 “어르신의 말씀 같지는 않습니다.”며 전 씨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전 씨가 바라보니 아버지를 대신해 제사에 참석한 포(鮑) 씨 가문의 열두 살 된 아이였다. 아부를 해도 모자랄 판임에도 포 씨의 아들은 당차게 말을 이어갔다. 내용은 이러했다.

천지의 만물과 우리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며 각기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리 사이엔 귀천의 구별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체구의 크고 작음과 지능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서로 먹고 먹힐 따름입니다. 서로의 먹이가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취하여 먹는 것입니다. 어찌 하늘이 애초에 사람을 위해 그것들을 창조했겠습니까? 모기가 사람의 피부를 물어뜯고 호랑이와 이리가 사람고기를 먹는데, 어찌 하늘이 본시 모기를 위해 사람을 창조하고, 호랑이와 이리를 위해서 사람의 육체를 만들어 놓았겠습니까?(‘열자(列子)’)

내가 살기 위해선 다른 것을 취해야 하지만, 그 다른 것이 내 먹이로 빚어지진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은 만물의 하나로 그들과 함께 살아갈 뿐, 그들을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주가 아니라는 통찰이다. 또한 사람이 만물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들이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는 순간 자동적으로 나는 나보다 힘이 센 그 누군가의 먹이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선 나 바깥의 다른 것을 섭취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과 공존해야만 한다. 애초부터 나를 구성하는 것 가운데 내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상기하면 더욱더 그러하다. 그래서 다른 것과의 공존은 단지 종교나 도덕, 이념 등의 차원에서 권장되는, 그 어떤 고차원적 규범이 아니다. 먹고 사는 데 바쁘다 보니 미처 지키지 못해도 양해되는 그런 덕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내가, 다시 말해 생명체로서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그칠 수 없는 호흡과 같은 활동이다.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이 다른 것과의 공존이란 것이다.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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