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1928년 즉위 후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히로히토 일왕에 대한 처벌수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전범처벌의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대선출마라는 야망을 품었던 맥아더는 만일 히로히토를 다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심판대에 세울 경우 마주하게 될 일본인들의 반발이 두려웠다. 일왕을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신’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은 만일 히로히토가 형장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분연할 것이고, 끝내 점령군에 부담스러운 여론이 형성될 것이란 계산이었다. 결국 전후 처리에 골몰한 워싱턴 거물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따야 했던 맥아더는 일본인의 민심을 얻고 동시에 동아시아 세력 확보의 디딤돌로 일본을 이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카드’, 즉 히로히토를 살리는 길을 택했다.
사료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같은 맥아더와 일본왕실의 시나리오에 따라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일왕은 궁을 빠져 나와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미국 대사관저로 향했을 것이다.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여겨진 일왕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장군’을 찾아 나선 이 사건은 일본인들의 굴욕이 됐음은 물론이다. 사가들은 이날 예복을 갖춰 입은 일왕이 부동자세를 취한 반면, 맥아더는 양손을 허리에 둔 편한 모습으로 촬영한 당시 히로히토와 맥아더 회동의 기념사진을 현대 미일 동맹을 증거하는 첫 번째 상징으로 평가한다. 왕실을 해하지 않아 일본 국민의 신의를 얻을 수 있게 된 맥아더, 목숨을 유지하며 실리를 취한 히로히토 양측의 욕망이 적당한 가격에 거래된 순간이다.
서로 수십만을 죽인 미국과 일본의 수장들이 종전선언문을 발표한 지 한 달이 지나자마자, 그야말로 선언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적에서 친구로 자리바꿈을 시도한 이날의 이벤트 이후 미일 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미국은 사실상 전범에 대한 면죄부를 뜻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종전 6년여 만인 1951년 일본을 영원한 미국의 동맹에 올렸다.
원폭투하부터 히로히토 일왕의 맥아더 방문,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이르기까지 최우선으로 실리를 추구한 양국의 현대사 시나리오에서 공교롭게도 일제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한반도의 배역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한미관계의 특수성을 신봉하는 이들에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이겠지만, 북한이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한미일 3국이 동등한 촉감으로 손을 잡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은 이후 종종 깨졌다. 급기야 주일 미군의 비용을 크게 줄여줄 수 있다는 계산 끝에 미국이 지난해 일본의 안보법안 통과를 음양으로 지지하는 ‘역코스’의 대목에선 미일 관계의 후순위로 처진 한미 관계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이 끼어들 틈새를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 미일 관계는 27일로 예정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방문에서 극단으로 빛날 듯하다. 미국은 물론 우리정부도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이뤄지는 오바마의 원폭투하지점 방문에 대해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바램’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모양새다. 하지만 남중국해 등에서 중국과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집단자위권의 무구를 쥔 일본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미국이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전범국의 굴레를 가볍게 하는 기회로 일본에 제공하고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아베 신조 총리의 진주만 방문 계획도 11월 중 실현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으며 도쿄에서 서로의 원하는 바를 교묘하게 나눠 가졌던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미국과 일본은 71년이 지난 5월 히로시마에서 아베와 오바마의 얼굴로 돌아오는 듯하다. 전범국 이미지를 씻고 동아시아 세력 다지기의 실리를 챙기는 두 강국의 히로시마 이벤트엔 1945년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위한 의자는 놓이지 않을 것 같다.
양홍주 국제부 차장ㆍ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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