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문학평론가 황현산, 시인 김혜순, 김정환, 세 문인이 새로운 시인 등단제도를 제안했다. 신춘문예에서 하듯 시 3~5편으로 등단 여부를 결정할 게 아니라, 최소 시집 한 권 분량(50~60편)을 보고 시인의 역량과 지향점을 포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언 이후 한동안 조용했던 이들이 3년 만에 결과물을 내놨다. ‘삼인 시집선’이란 이름으로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유진목 ‘연애의 책’과 조인선 ‘시’다. 3년 간 200여명이 보내온 200권 분량의 시를 꼼꼼히 살펴 가능성 있는 원고엔 심사위원의 메모를 붙여 반송하고 수정한 시를 다시 심사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선정됐다.
유진목(필명)씨는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쓴다. 조재룡 문학평론가가 “한국 최고의 연애 시”라 칭송한 ‘연애의 책’은 연애 일기이자 때이른 삶의 복기다. 죽음의 문턱에 목을 걸치고 그 너머를 꿈꾸는 무기력한 와중에 문득문득 발하는 삶에 대한 증오와 애정이 선뜻하다.
“미선나무 기슭에서 나는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었다// 겨울이었고/ 차라리 땅에 묻히기를 바랐다// 이걸 알면 슬퍼할 사람을 떠올렸다// 맨 처음 너가 울었다// 그러면 너를 안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아 있어서 많이 힘들지 (…)가보면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섭다고 그랬다// 그런데 사실은 그럴 줄 알았다고도 했다/ 예감이란 게 있었다고// 그들은 틀린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도 사람이 싫었다.” (‘미선나무’ 일부)
조인선씨는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시작으로 시집을 5권이나 냈다. 안성에서 소를 키워 판다는 그의 시엔 지금 발 딛고 선 사회의 부조리, 평생 자신을 사로 잡았을 시에 대한 애증이 뒤엉켜 있다. 세월호 참사에 부쳐 쓴 시가 눈에 띈다.
“대학살 이후 서정시는 끝났다는데/ 망할 놈의 세상 그래도/ 달은 떠 있어/ 담배 하나 다시 피워 물고 주인 없는 망망대해 떠돌던 언어 하나/ 그 환한 빛이 길 떠나는 마음이라며/ 밤 깊도록 끙끙거리는데/ 그래도 시는 안 되고/ 부서지는 그 마음도 사랑이라며/ 바다 앞에 두고 돌이 된 어미 심정으로/ 자본과 우상이 지배하는 어둠의 깊이를 더듬고 싶었을 뿐/ 뒤집힌 배 안에서 살아남은 자처럼/ 손끝에 힘을 주고 언어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을 뿐.”(‘의미에 대하여’ 일부)
3년 만에 첫 테이프를 끊은 삼인시집선은 우선 20권까지 출간할 계획이다. 황현산 평론가는 “신춘문예로 당선된 뒤 시집 한 권 못 내고 사라져 버리는 시인들이 많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자질과 역량면에서 튼튼한 시인을 배출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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