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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살균제 없이도 더없이 충분해

입력
2016.05.2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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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등장하는 시구가 떠오르는 시절이다. 그날 강남역 노래방의 화장실에 가지 않아서 살아남았고, 지난 세월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진짜 운이 좋았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주요 20개국 중 여성 피해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에서, 가습기 살균제 비극이 집중된 가임 여성과 영ㆍ유아 집단에 속하는데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졌다고 윤동주 시인 버금가는 참회를 했지만, 시인이 아니고 시민단체 활동가인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를 곱씹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옥시 제품이나 몇몇 성분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화학물질 관리 체계를 다시 짜야 한다.

우선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성분을 금지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세퓨’ 제품의 원료를 공급한 덴마크에서는 농업용임에도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성분을 금지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가습기 살균제 유해 성분이 다른 제품에 들어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그다음으로 스프레이나 에어로졸 형태의 생활화학제품의 경우 성분 정보가 파악되고 일정 기간 노출 테스트를 거쳐 안전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미국 환경실무그룹(EWG)은 안전한 성분이 들어있는 자외선 차단제라 할지라도 호흡기 노출을 우려해 스프레이를 피하라고 권한다. 안전성이 확보되기 전까지 스프레이 제품 사용을 주의하고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계기로 위해성이 높은 스프레이 형태의 생활화학제품, 영ㆍ유아가 바르는 화장품이나 입에 넣고 물고 빠는 장난감 등 민감계층 사용 제품에는 사전허가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 즉 성분이 사전에 보고되고 허가된 성분을 등록된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현재 관리 체계에서는 어린이 제품이든 스프레이 제품이든 유해하다고 지정된 몇몇 성분만 들어있지 않으면 국가가 인증하는 KC 마크를 받을 수 있다.

이미 2015년에 총체적으로 화학물질을 관리하기 위해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시행된 바 있다. 그러나 기업의 반대가 들끓고 이에 화답하사 대통령께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시면서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다. 그 결과 지금의 화평법으로는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제대로 예방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들린다. 화평법의 느슨한 구멍을 메워 유럽연합의 화평법인 ‘리치(REACH)’ 수준으로 보강하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미생물, 세균, 바이러스 등 사람과 동물을 제외한 생명체를 죽이거나 억제하는 살생물제는 따로 관리돼야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살충제, 살균제, 항균제가 바로 살생물제다. 유럽연합에서는 회사가 살생물제 성분을 신고하면 평가와 승인을 거친 후에만 사용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살생물제의 활성 물질과 최종제품은 환경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환경청은 제품에 들어간 성분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를 운영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작년에 김영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물질안전보건자료에 따르면 서울 시내 초, 중, 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세제에는 트라이클로산이라는 항균물질만 제외하면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나 크게 유해한 성분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기회에 이 제품에서 저 제품으로 갈아타는 선에서 그치지 말고 99% 항균, 살균, 박멸에서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인체는 수만 년의 진화 과정 내내 장내 미생물과 공존하면서 면역체계를 발달시켜왔다. 우리 몸과 주변 환경에서 미생물을 싹싹 몰아내고서는 건강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제 수많은 화학제품과 항균제품을 다이어트해보자. 몇 년 동안 소다와 구연산, 폐식용유로 만든 비누로 살아왔지만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충분했다.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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