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조현병 탓 여성에 피해의식
“피해망상 심해져 사실 왜곡 인지”
특정집단 공격 혐오범죄와 달라
피의자 “일반 여성에 반감 없다”
경찰이 서울 강남 20대 여성 살인사건을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렸다. 당초 범행 동기로 제시됐던 ‘여성 혐오’ 등 증오 성향은 피의자의 병력과 범행 과정에 비춰 살인의 직접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경찰의 판단이다.
서울경찰청은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를 투입해 피의자 김모(34)씨에 대한 두 차례 심리면담을 진행한 결과 “김씨가 오랫동안 앓아 온 조현병(정신분열증)과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살인의 배경이 됐다”며 “전형적인 정신질환 범죄 유형에 부합한다”고 22일 밝혔다.
경찰의 심리분석 결과에 따르면 김씨의 피해망상 증세는 2003년 무렵 시작됐다. 김씨는 어머니에게 “누가 나를 욕한다”며 환청을 호소하고, 기물을 부수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 2008년부터는 1년 이상 몸을 씻지 않거나 노숙을 하는 등 자기관리 능력도 상실해 올해 초까지 6차례에 걸쳐 병원 입원치료를 받았다.
피해망상 대상이 여성으로 변화한 건 2년 전부터다. 김씨는 2014년 한 교회가 개설한 신학원에 다녔는데 ‘특정 그룹에서 추진력 있게 일을 하려 해도 여성들이 견제한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결정적으로 경찰은 가출 후 서빙 업무를 하던 김씨가 이달 5일 ‘위생이 불결하다’는 지적을 받고 다른 식당 주방보조로 옮기게 되자 이 일을 불특정 여성의 음해 때문으로 여겨 범행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범행 전 김씨가 보인 일련의 행동패턴이 정신질환에서 비롯된 만큼 여성 혐오와는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여성들이 지하철에서 천천히 걸어 나를 지각하게 만든다” “담배꽁초를 일부러 나에게 던진다” 등 막연한 피해의식을 드러냈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망상이 심화해 명확한 근거 없이 사실을 왜곡ㆍ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또 ▦피해자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점 ▦화장실에 들어온 피해자를 바로 공격한 점 등 범행 목적이 불분명해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배타성이 뿌리 깊은 혐오 범죄(Hate Crime)의 특성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특정 민족이 한국에 들어와 나라를 망친다’는 망상에 빠져 해당 국민 3명을 살해한 경우 이를 인종혐오가 아닌 정신질환 범죄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김씨도 면담에서 “여성혐오 때문이 아니라 실제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범행을 했다. 일반 여성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서초경찰서는 김씨가 범행을 모두 시인했고 범행도구 등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확보한 만큼, 범행 동기를 보다 구체화한 뒤 25일쯤 사건을 검찰로 송치할 계획이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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