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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일장기 지운 사진 실은 조선중앙일보 사옥

입력
2016.05.2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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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현 NH농협은행 종로지점 건물은 90년간 이 자리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목도했다. 안창모 제공
1926년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현 NH농협은행 종로지점 건물은 90년간 이 자리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목도했다. 안창모 제공

서울 안국동 길에서 한 발 물러서 있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갖고 있는 건물이 NH농협은행 종로지점이다. 붉은 벽돌에 흰 색 머리띠를 두른 듯 한 외관은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붉은 벽돌에 남아있는 희끗희끗한 흔적들은 해방 이후 잊혔던 건물의 역사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남은 생채기다.

건물에 담긴 역사가 잊힌 채 관리되던 이 건물이 2014년 오두희 종로지점장의 의지로 다시 태어났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에 쉽게 띄어야 경영에서 유리한 도심지에서 여느 빌딩처럼 자신의 이름을 크게 쓴 명찰을 갖고 있지 않은 건물이 바로 NH농협은행 종로지점이다. 당시 농협은 원 모습을 잃고 어색한 분홍 색감의 페인트를 지우고 원 모습 복원을 희망했는데, 결과적으로 원 모습에 담긴 역사까지 챙길 수 있었다. 현재 용도가 은행이라 해방 전에도 은행이나 금융조합건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뜻 밖에도 이 건물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큰 족적이 남아있다.

서울 인사동을 지키는 파수꾼, 현 NH농협은행 종로지점 건물의 모습. 안창모 제공
서울 인사동을 지키는 파수꾼, 현 NH농협은행 종로지점 건물의 모습. 안창모 제공

건물이 지어진 것은 1926년 7월 5일이었다. 신축 당시 건축주는 조선일보였고 월남 이상재가 사장, 주필은 송진우였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경영난을 겪다 방응모에게 운영권이 넘어갔고, 이 과정에서 이 건물의 소유권 문제가 법정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소유권 문제가 정리된 후에는 여운형이 사장을 지낸 조선중앙일보의 사옥(1933~1937)이 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해방 전 우리 언론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이른 바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1936년 8월 13일 마라토너 손기정이 우승한 기사를 전하면서 손기정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운 사건이다.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은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동시에 실렸고, 두 신문은 동시에 정간 처분을 받았다. 조선중앙일보는 1년 2개월간 지속되던 정간이 1937년에 해제되었지만, 경영상 어려움으로 인해 1937년 11월 5일 결국 폐간되었다. 해방 후 이 건물은 구농협은행의 경기도 지점으로 사용되었으며 자유당 당사로 이용되기도 했다. 4ㆍ19혁명 직후에는 자유당 잔류파가 생존을 위해 잠시 만들었던 공화당이 이 건물을 사용한 적도 있다. 5ㆍ16쿠데타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립한 중소기업은행이 농협에서 분리되면서 이 건물을 본점으로 사용했으나 을지로에 중소기업은행 본점이 신축되면서 다시 농협에 넘어왔다.

길지 않은 근현대사의 역사를 짧게 훑기만 해도 숨찰 정도로 이 건물에는 격동의 한국사가 응축되어있다. 티끌 모아 만든 태산으로 우리 경제를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농협이 기여하고 있다면, 농협 종로지점은 한 발 더 나아가 역사를 품은 현장을 보존하며 인사동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안창모 경기대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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