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폭력 중단 필리버스터
어릴 때부터 경험한 차별 등
여성혐오 문화 비판 쏟아져
서울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 살인 사건 후 여성 대상 폭력ㆍ혐오ㆍ차별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20일 서울 신촌에서 마련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위한 합법적 무제한 토론)’ 행사에서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 일상화한 폭력에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노출돼 있는지 보여주는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날 오후 5시부터 21일 오전 1시까지 이어진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100여명의 시민 앞에서 여성들이 겪는 폭력부터 혐오ㆍ차별 사례까지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경험들을 털어 놓았다. 한 참가자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유사하게 어린 시절 상가 공용화장실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아픈 얘기를 털어놓으며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A(21)씨는 “12세 때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상가 공용화장실에 갔다가 술 냄새가 나는 남성 두 명이 흉기로 위협해 그 일(성폭행)을 당했다”며 “제가 잘못한 일처럼 느껴져 중학생 때까지는 여름에도 검정 긴바지만 입고 다녔다”고 토로했다. A씨는 그러면서 “한국 사회에서 모든 여성들은 몸가짐 때문이 아니어도 범죄에 노출돼 있다”며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세상이 날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여대생 오희(23ㆍ필명)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 되는 게 많다고 스스로 내면화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며 “이 땅의 누구도 여성이라면 살해당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여성들이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여성혐오 문화에 동화돼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자책하기도 했다. 여대생 은혜(23ㆍ필명)씨는 최근에 한 친구가 성폭행 당했던 사실을 어렵사리 거론하며 “속상한 건 그 친구에게 무의식적으로‘조심하지 그랬어. 왜 밤늦게 돌아다녔어’라고 말할 뻔한 제 자신”이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발언 중간 감정에 복받치는 듯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도 있었다. 최원진(32ㆍ여)씨는 “7, 8세 때쯤 오빠들이 ‘넌 여자 같지 않다’는 이유로 돌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며 “당시만 해도 내가 여성스러워야 저 오빠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랐는데 그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제는 잘 안다”고 울먹였다.
행사 도중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 나오자 환성도 터졌다. 우리(필명)씨는 “우리가 이런 폭력에 기 죽으면 안 된다. 당하면 당할수록 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노동자로서, 납세자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일 민우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된 이날 행사에는 하루 사이에 40여명이 발언을 신청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는 시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행사 현장에서 만난 박모(27ㆍ여)씨는 “여성으로서 평소 위험을 늘 감지하고 있었는데 이번 강남 노래방 화장실 살인사건은 그게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라 더욱 충격이었다”며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남성들의 모습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대학생 윤모(26)씨는 “강남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사건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답답한 현실”이라며 “이번에 촉발된 논의를 그냥 묻어버리지 말고 세상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석한 남윤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번 일이 한 개인의 사건으로 잊혀져서는 절대 안 된다”며 “관련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방안도 입법하겠지만 그보다는 교육을 통해 사회 전반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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