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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ㆍ약탈ㆍ자포자기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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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ㆍ약탈ㆍ자포자기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삶입니다”

입력
2016.05.2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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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낙천적이고 호방한 어조로 삶의 희망을 연설한 고독한 유토피안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백년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낙천적이고 호방한 어조로 삶의 희망을 연설한 고독한 유토피안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

민음사 발행·240쪽·1만4,000원

마술적 리얼리즘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는 연설을 “인류가 처한 가장 끔찍한 곤경 중 하나”로 여긴다. ‘백년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등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이 작가는 불세출의 명연설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으로 후대 수상자들에게 엄청난 부담감과 압박감을 주었지만, 연설이라는 장르에 생래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사나이다운 호방한 언변과 열정으로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지성을 매력적으로 대중화한 이 작가는 그러나, 아니, 당연하게도 탁월한 연설가였다. 선배들을 위한 고등학교 졸업식 송사로 첫 무대에 오른 17세부터 스페인 국왕이 참석한 스페인어 국제 총회 개막식에서 한 팔순의 연설까지, ‘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는 그의 일대기를 그려볼 수 있는 연설문들을 모은 책이다.

평생을 지속하는 우정부터 글쓰기, 언어, 정체성, 핵무기, 국제정치, 언론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주제는 방대하다. “우리 작가들이 각자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불행한 이유로 이 일을 하게 되었”기에 “우리의 고독한 작업에 대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어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이나 특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문학의 독자적인 사명을 찬미하지만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로 문학에 절대우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신문기자로 일하며 라틴아메리카 현실에 뜨겁게 개입하고 그 과정에서 소설이 생산되는 방식으로 작업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작가 세대가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문학 기자의 기사를 반박하기 위해 쓴 단편소설이 신문에 전재되며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착상하고 살찌우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할 때만 즐겁고 “막상 집필하면서는 이미 작품에 큰 관심이 없”게 된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백년의 고독’은 17년에 걸쳐 착상해 18개월 동안 쓴 소설. 쓰면서는 “가장 흥분되는 꿈에서조차 100만부를 찍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알파벳 스물여덟 개와 두 손 가락만으로 고독한 방에서 쓴 이야기를 읽겠다는 결심을 무려 100만명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백년의 고독’은 5,400만부가 팔렸다. “양식을 기다리는 스페인어 독자가 수백 만 명이 있으며, 그들의 갈증을 달래주는 것이 우리 직업의 진정한 존재 이유”라고 한 대목은 독자부재에 시달리는 한국문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아메리카 언론 총회 개막 연설에서는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창의성을 꼽으며 언론을 문학 장르로 규정한다. 녹음 등 기술의 발달로 인터뷰가 중요한 기사 형식이 된 오늘날, “기자들은 다음 질문을 생각하느라 그 대답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며 “진실의 목소리는 기자가 아니라 인터뷰 대상이 내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현 언론인들이 공유하는 것 같다”고 꼬집는다. 무책임한 인용으로 점철된 무책임한 기사 대신 인터뷰이의 말을 “자신의 지성으로 편집”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이라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억의 방주’를 만들어 “새로운 인류가 바퀴벌레는 이야기해 주지 않을 것들”을 남기자고 제안한 연설도 있다. “이 땅에 가시적인 생명체가 출현한 이후 3억8,000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 장미가 생겼습니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원생대를 지나서야 비로소 인간은 증조부인 자바 원인과 달리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삶이 존재했고, 그 삶 속에 고통이 만연하고 부정부패가 판을 쳤지만,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행복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폭력, 마약, 독재에 시달리는 놀랍고 참혹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두고 “우리는 거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도전은 우리의 삶을 믿을 만하게 만들어 주는 양식화된 도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고독의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약탈과 자포자기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삶”이라며 “몇 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전쟁도 죽음에 맞서 좀처럼 죽지 않는 삶의 이점을 축소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희망부재의 시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인용한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되새겨보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힘이 될 것 같다. “나는 인간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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