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에서 인터넷까지
토머스 J 미사 지음ㆍ소하영 옮김
글램북스 펴냄ㆍ528쪽ㆍ2만9,000원
과학이 기술의 핵심이라는 생각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과학적 발견은 기술혁신의 동인이며 과학적 진보가 기술 혁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바람직하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이런 견해를 ‘선형 모델(linear model)’이라고 한다. 전류의 기본법칙과 에디슨의 전등 시스템, 유기화학에 대한 통찰과 합성 염료 산업의 연계, 물리학자를 포함해 수많은 과학자가 동원된 미국의 핵개발(맨해튼) 프로젝트 등을 생각해보면 과학은 기술의 핵심이고, 기술은 과학의 시녀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근대세계를 추동하는 프로펠러다.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과학기술사를 가르치고 있는 토머스 J 미사는 이런 생각이 20세기 전반기에 생겨난 모더니즘적 사고의 유물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근대 500년 역사 속에서 풍부한 논거를 찾는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시대를 시작으로 중상주의시대, 산업시대의 과학적 이론과 통찰이 곧바로 기술혁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과학적 발견이 르네상스 시대의 화약 무기나 궁전 건축기술의 동인이 되지 못했고, 중상주의 시절 네덜란드 상업시대에 목재를 사용한 조선술이나 설탕 정제업을 발전시키지도 못했으며, 산업혁명 시기의 증기 추진식 공장을 탄생시키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과학사학자 핸더슨은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기기관이 과학에 진 빚보다 과학이 증기기관에 진 빚이 더 크다.”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을 측정하고 분석하면서 오히려 열역학이라는 과학이 생겨난 것만 보더라도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과학과 기술의 상투적인 선형모델을 따르는 대신 기술이 어떻게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에 영향을 끼쳐왔으며 역으로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적 동기가 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이 책은 ‘기술과 문화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르네상스 이후 2010년대까지 500년에 걸친 기간을 9개의 시기로 세분한다. 20세기 이전 시기까지의 5단계는 르네상스라고 알려진 궁정시대, 네덜란드가 주도하는 중상주의 시대, 영국이 중심이 된 1차 산업혁명 시기, 증기기관과 철도, 전신 등을 앞세워 식민지를 침략했던 제국주의 시기, 독일의 화학공업과 미국의 전기, 전력 산업이 중심이 되는 제2차 산업혁명시기로 각각 구분된다. 20세기 이후는 양차 대전을 포함, 1900년~1950년까지의 모더니즘 시기, 2차 대전과 이어지는 냉전을 거치면서 국가가 군사기술을 앞세워 과학 기술의 발전을 주도하는 시기,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인터넷의 확산과 세계화의 시기, 마지막으로 9ㆍ11 이후 세계화가 그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모든 면에서 취약함을 드러내는 4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저자는 500년에 걸친 기술과 사회의 상호 영향에 대한 역사적 통찰을 바탕으로 ‘이제 그만: 기계화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쓴 빌 맥키번이나 ‘내가 컴퓨터를 사지 않는 이유’를 쓴 웬델 베리 등의 문명 비판론자들의 나이브함까지 비판하는 한편, 기술의 맹렬한 발전을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스튜어트 브랜드나 조지 길더, 레이 커즈와일 등 기술지상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저자는 비관론과 낙관론을 딛고 기술을 더 나은 방향, 즉 지속가능성과 안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됨을 역설한다. 하지만 어떻게? 저자가 제시한 최종방안은 조금은 빈약하게 느껴진다. 군데군데 거친 번역도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이형열 과학책 읽는 보통사람들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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