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시절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아야 했던 소녀들의 이야기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던 영화 '귀향'을 기억하시나요? 영화 속 소녀처럼 만주로 끌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중국의 한 복지원에서 힘겹게 살던 이수단 할머니가 지난 17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일 오전, 이 할머니의 떠나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한달음에 중국으로 달려간 안세홍 사진작가가 빈소의 모습을 전해와 소개합니다. 동아시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안 작가는 15년 전 취재차 만났던 이 할머니와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줌인… 세월의 퍼즐을 맞추다)
조선인으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중국 오지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중국인 '이봉운'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안 작가가 전해온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북단 둥닝현 외곽의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 할머니의 빈소는 다소 썰렁한 모습입니다. 할머니의 중국인 양아들, 안 작가를 비롯한 지인들, 양로원 직원, 영사관 직원 등 10여명이 곁을 지켰습니다. 영정사진 곁에는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국무총리, 윤병세 외교부 장관,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등이 보낸 화환 12개가 놓여 눈에 띕니다.
한때 연락이 뜸했던 중국인 양아들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는데 특별한 유언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난 이후 유달리 아끼던 인형과 오래된 가족사진이 유품으로 남았습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전쟁을 겪어낸 여느 위안부 피해자처럼 이 할머니의 삶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평안북도 출신인 이 할머니는 열 아홉 살 되던 해, 돈을 벌게 해준다던 일본군 앞잡이의 말에 속아 하얼빈 부근의 아청 위안소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둥닝현의 시먼즈 위안소로 팔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에게 시달려야 했죠.
해방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진 못했습니다. 왜 돌아가지 않았던 걸까요? 안 작가는 “전쟁이 끝난 후 버려졌던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중국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중국 말을 몰라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며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함께 위안소 부근 마을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버려졌던 둥닝현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인접한 곳입니다. 전쟁의 최전선으로 유달리 위안부 피해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 위안소 부근에서 나름의 삶을 꾸렸고, 한족 마을에 정착하면서 조선말도 잊어버렸습니다. 남편을 만났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중국인 양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등 삶이 순탄하진 않았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이후엔 29년 간 경로원에서 생활했죠. 그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경로원에서 두 번의 수술, 정신분열증, 대퇴골 골절, 알츠하이머 등을 앓으며 힘겨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 할머니의 유골은 20일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에 위치한 김좌진 장군 기념관인 한중우의공원에 안치될 예정입니다. 이 할머니가 중국 국적자여서 국제법상 유골을 국내로 옮기긴 어렵다고 합니다. 2005년 우리정부의 권유로 한국 국적을 잠시 회복했지만, 중국에서 오랜기간 살아왔기 때문에 여러 불편으로 다시 한국 국적을 포기했습니다.
안 작가는 "그간 찾아오는 사람 없이 지냈던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배웅해드리겠다"면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떠나면서 이제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42명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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