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의 큰 반발 속에 의료법인 인수합병 허용법안이 폐기된 지 단 하루 만인 지난 18일, 정부는 의료산업과 관련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내세우는 명분은 여러 가지 번거로운 규제 절차를 대폭 축소하여 환자의 편리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안들이다. 우선 약국이 문을 닫았을 때 불편한 사람이 많으니 의약품 자동판매기를 설치를 허용하자는 것이다. 그리하면 의사 처방이 필요하지 않은 일반의약품에 대해서는 자판기에 달린 원격화상 통신기기로 약사와 상담하고 복약지도를 받은 뒤 바로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또 뇌졸중, 알츠하이머 등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에 사용되는 치료제도 대규모 환자를 대상으로 해서 효능과 안전성을 시험하는 3상 임상시험을 거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우선 2상 임상시험을 거치면 앞으로 3상 임상시험을 거쳐서 결과를 제출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허가를 해주겠다는 안을 내놨다. 그런가 하면 난치병 치료에 사용되는 고가의 신약에 대해서는 건강보험 약가 산정 기간이 오래 걸리니, 보험이 적용되기 전에 우선 무상 또는 저가로 환자에게 공급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밝히고 있다.
얼핏 듣기에 모두 환자의 이익과 국민의 편리함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날 발표된 의료규제 완화 방안은 그 문제점이 의료법인 인수합병안과 비교해서 결코 덜하지 않다. 우선 지금 의료와 관련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조치가 과연 규제 완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현재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드러나고 있듯이, 현재 시민 건강을 위해 더 필요한 것은 불필요한 규제의 철폐보다는 여러 위험 요인에 대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규제를 실질적 강화하는 것이다. 최근 ‘신해철법’이라고 불리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분쟁조정법이 법사위를 통과했다고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시술로 가수 신해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의사는 그 후 병원만 옮겨 또다시 유사한 시술 끝에 어느 외국인 환자를 사망하게 했다.
사실 정부의 관심은 국민의 편리함보다는 제약회사의 편리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인상이지만, 정책의 제일 목표가 편리함이라는 건 그 자체가 더 문제일 수도 있으므로 이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 핵심은 국민건강에서 형평성과 안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의료산업의 빠른 성장을 목표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임상시험을 생략하면 3년 가량 신약의 출시를 앞당겨 우리나라 의약 산업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보도 속 관계자의 말 어디에도 이것이 환자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이야기는 없다. 건강보험 약가 산정이 진행되는 동안 무상 또는 저가로 약품이 공급되게 하겠다는 것 역시 지금도 건강보험공단이 다국적 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약가 협상에서는 제대로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새로운 의약품이 적정한 평가를 거쳐 보험체계에 들어오기 이전에라도 이미 시장을 장악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 글로벌 제약업계에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중요한 시장”이라는 최근 어느 다국적 제약회사 사장의 발언은 반길 일이 아니다. 경제 규모와 비교해서도 과도하게 고가의 의약품을 소비해 왔고, 그 비용은 각 개인의 과도한 의료비 지출뿐 아니라 건강보험재정 악화로도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의료 규제 완화는 소비자로서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내세우고 있지만, 의료의 산업화를 부추기고 제약업계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시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사고가 나도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도 모를 약 자판기가 아니라, 어느새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동네약국, 동네의원이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ㆍ문화인류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