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5월 18일

1048년 5월 18일 페르시아(오늘의 이란)의 시인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이 태어났다.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술탄의 명으로 꽤 정밀한 달력을 고안한 천문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사행(四行) 시편 ‘루바이야트’의 시인으로 더 널리 기억된다.
“보라, 허물어진 세월의 여인숙에/ 밤과 낮이 엇갈리며 출입하누나/ 대대로 내려오는 술탄의 영화 또한/ 숙명의 시간이 다하는 날 사라지리”(17편)
“사랑하는 이여, 어서 이 잔을 채워/ 지난 회한과 내일의 두려움을 씻게 해다오/ 닥쳐올 날이야 무슨 소용 있으리/ 내일이면 이 몸도 칠천 년 세월 속에 잊혀질 것을”(21편)
“아, 이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쓰자꾸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한 줌 흙이 되어질 몸/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 쉬니/ 거긴 술도 노래도 없이 한없이 넓은 곳”(24편)
“오늘만을 위해 사는 이 있고/ 내일을 지켜보는 사람 있지만/ 암흑의 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바보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25편)
민음사 판 ‘루바이야트’(김상옥 옮김)에는 작가 이름이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로 되어 있다. 19세기 영국의 무명 시인이던 피츠제럴드는 중년에 재미 삼아 페르시아어를 익혔고, 어쩌다 카이얌의 시를 본 뒤 75편을 번역해 1859년 소책자로 발간했다. 그 시집이 윌리엄 모리스, 존 러스킨 등 당대 영국의 지식ㆍ예술인들을 매료시키고, 유럽과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산업혁명을 거쳐 제국주의와 문화제국주의 시대를 살던 유럽인에게 낯선 시공간 낯선 시인의 낯익은 시정이 흥감스러웠을지 모른다. 유목민족 특유의 현세주의와 수피즘의 구도적 경지로까지 솟구치는 허무적 쾌락주의가 벨에포크를 예비하던 그들의, 당시로선 생경했을 욕망을 찔러댔을 수도 있다. 같은 해에 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과 나란히 두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전복적ㆍ전환기적 정조를 자극했으리라 분석하기도 한다. 사실 그의 시편들은 지금도, 우울과 낙담, 희열과 낙관의 그 어떤 정서와도 기묘하게 잘 어울린다.
피츠제럴드의 번역이 원문과 사뭇 다르다는 사실, 어떤 시편은 너무 판이해서 카이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루바이야트는 번역 윤리와 별개로, 어쩌면 그 결함의 베일 덕에 여전히 신비로운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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