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통신사 회선 빌려 통신업
진입장벽 낮아 전국 576곳 등록
적발된 선불 대포폰의 62% 차지
경찰의 통화기록 조회에도 불응
미래부 관리ㆍ감독은 초보적 수준
지난달 13일 제주 서귀포시의 한 임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중국여성 A(24)씨. 살해 용의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경찰은 기초 단계인 통신 수사에서부터 벽에 가로막혔다. A씨와 주변 인물들이 불법체류 신분이었던 탓에 대부분 대포폰을 사용했지만 휴대폰을 개설한 것으로 추정된 별정통신사 26곳은 경찰의 통화기록 조회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14일 범인 쉬모(33)씨가 자수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다. 수사를 담당한 서귀포경찰서 관계자는 17일 “살인 사건의 가장 중요한 단서가 통화 기록인데 별정통신사들이 ‘휴일에는 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등 갖은 핑계를 대며 자료 제출을 미루는 탓에 수사팀 2명이 통신사 관계자들을 만나러 서울까지 출장을 가야 했다”고 말했다.
기간통신사업자의 회선을 빌려 통신업을 하는 별정통신사 휴대폰이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대포폰이나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등 별정통신사를 통한 정보통신 범죄는 확산 추세이지만 정부의 관리 소홀로 불법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이스피싱은 별정통신사를 기반으로 한 대표적 범죄로 꼽힌다. 대부분의 사기 조직은 해외 인터넷전화를 이용하면서 번호를 070에서 국내 지역번호로 조작해 피해자를 속이는 수법을 쓰고 있다. SKT 등 이동통신 3사의 경우 변조된 발신번호를 차단하거나 변조 전 번호를 알려주는 기술을 갖춘 데 반해 일부 별정통신사는 비용 문제로 이를 외면하거나 실적을 높이려 되레 사기범죄를 방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 일선 경찰서 한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신고가 들어와 통신 기록을 살피다 보면 80% 이상이 별정통신사를 경유하고 있다”며 “확인해야 할 업체가 수십개에 달하고 기록 요청 공문 처리와 확인에만 한 달 이상이 걸려 수사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각종 범죄 도구로 쓰이는 대포폰 판매도 별정통신사의 오랜 악습이다. 경찰청이 지난해 3월 ‘대포폰 집중 단속’을 한 결과 적발된 전체 대포폰(3,997대) 중 별정통신사 선불 대포폰은 62.2%(2,486대)에 달했다. 2014년(152대)보다는 16배나 급증했다. 당국이 단속을 강화하면서 대포폰 개통이 어려워지자 범죄자들이 신원 확인 절차가 상대적으로 허술하고 온라인을 통해 손쉽게 개통이 가능한 별정통신사의 선불 휴대폰을 악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별정통신사 관계자는 “업무 인력이 적고 매출도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판매한 휴대폰의 용도를 면밀히 살피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별정통신사가 범죄 통로로 자리잡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정부 허가와 심사를 받아야 하는 유ㆍ무선통신사, 인터넷통신업체 등 기간통신사와 다르게 별정통신사는 재정ㆍ기술능력 등 일정 요건을 갖추고 등록만 하면 사업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간단한 절차로 인해 3월 현재 전국의 기간통신사는 89곳인 반면, 별정통신사는 6배가 넘는 576곳에 이른다. 이동통신업체 B사 관계자는 “정부가 통신 3사의 독과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별정통신업 등록을 느슨하게 하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졌고, 불법에 눈감고서라도 수익을 내려는 업체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의 별정통신사 관리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별정통신사의 번호조작, 부정가입방지 시스템운영 등 불법행위를 관리ㆍ감독하는 실무 인력은 두 명뿐이다. 연간 8억원 정도인 보이스피싱 대응 관련 예산 중 영세 별정통신사의 기술 지원에 투입되는 돈 역시 5,000만원에 불과하다. 미래부 관계자는 “별정통신 사업자들의 시스템 문제를 수시로 점검하고 있으나 영세업체들이 워낙 많아 단기간에 불법 여부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해명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최근 일부 별정통신업체 직원들이 수익을 높이려 범죄 브로커와 결탁할 정도로 과당경쟁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며 “휴대폰을 발급할 때 사용처와 용도에 대한 확인 문서를 받아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등의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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